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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년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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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의 전복성과 모순의 문장들
서안나(시인 · 문학평론가)
꽃들은 뿌리의 말이다 어젯밤 꿈에 놓쳐버린
꽃사슴을 아쉬워한다 주어진 말놀이 과제나 실
행해야겠다 내 안에 꽃사슴을 너무 가둬 두었다
-「꽃들은 뿌리의 말이다」
1. 모순의 문장과 난독의 즐거움
이순주 시인의 시집 원고를 감은 눈으로 읽었다. 시는 함축적이며 이미지와 상상력이 겹겹이 들어찬 겹꽃 같아 독자들에게 쉽게 맨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독자가 시를 여러 번 읽고 음미할 때 비로소 시의 다양한 결을 해독할 수 있다. 읽을 때마다 시가 독자에게 다른 표정을 제공하는 이유 역시, 시인이 시에 숨겨둔 다양한 시적 장치와 상징의 힘에 있다. 이순주 시인의 시집 역시 그렇다.
그의 시집에는 사유의 궤적을 내장한 문장들이 시집 곳곳에 버티고 서 있다. 좋은 문장들이 많다는 것은 시인이 시집에 많은 공력을 들였다는 것이다. 이순주 시집에서 개성적인 문장은 두 가지 형식으로 등장한다. 하나는 감각의 결합과 전이를 통한 소재의 변용이다. 시각적 감각이 청각이나 후각 등 타 감각으로 전이되어 촉각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감각 간 결합과 타감 각으로의 전이는 단독 감각의 구사보다, 자연과 인간이 경계가 합일하는 물활론적인 촉각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간절한 기도의 방식 우리가 먹은 건 붉은 생애-「하현」
잠에서 막 깨어난 달빛을 다 끌어온 이 서가,-「한 권의 책」
내 울음은 어두움을 달래려 무시로 피어나는 꽃-「검은 고양이」
펼쳐진 화선지 위에 한 자루 붓이 어둠을 토해낼 때 달빛과 먹이 섞이면 비백이 생긴다 창문은 악보처럼 열려 있다-「달빛은 듣는 것이다」
또 다른 문장의 형식은 문장의 주어부와 서술부의 폭력적 결합이다. 이 폭력적 결합은 문장의 주어부와 서술부에 여백을 건설하여 시적 발견을 가능케 한다. 층위가 다른 사물이나 돌연한 이미지 간의 결합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미적 체험을 제공하고, 삶의 비의(秘義)와 진실에 가 닿는 체험의 동기를 제공한다.
이 계절 고독은 이곳에 와 죽었다-「단풍 숲에서」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나를 스무 번 사랑하지 오늘 죽어 나는 내일 다시 태어나지-「밀서」
여기까지 걸어온 모든 궁리가 구석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구석에도 감정이 있네 영혼을 들여다보며 다듬기도 하는 무엇이든 거듭나게 하는 구석의 마법! 내 희망은 그곳에서 자라고 있었으니-「어떤 계절은 구석에서 시작된다」
그리움은 그토록 아프게 찾아오는가 이별이란 잠시 서녘을 바라보는 일-「분홍 꽃무늬 손수건」
너는 내게 오지 않아서, 나는 네게 가지 않아서 서로에게 오지가 된다-「반달곰과 시소 타기」
너를 기다리며 화분에 물을 주는 건 기도다-「꽃의 사서함」
꽃은 멀리 피어 그리움을 만든다 (… 중략 …) 꽃들이 나를 불러낸 게 분명하다 -「벚꽃열차」
불빛들이 마음 환히 밝혀준다면 꽃밭인 게 분명하다-「저녁이 아름다운 건」
활짝 피어난 꽃들은 세상 모든 여자의 아름다움을 가져가 피어난 것이다–「꽃들의 배후」
이순주 시집에서 드러나는 문장의 특징은 아포리즘의 글쓰기로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아포리즘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신조, 원리, 진리 등을 간결하고 압축적인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 글”이다. 아포리즘 문장은 “~이다”라고 끝을 맺으며, 구체적 대상에서 비구체적이고 관념적으로 나아간다. 아포리즘의 문장은 독자들에게 신선한 감각으로 삶의 진리나 가치 등을 제공하여 독자와의 공감대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시집에서 아포리즘 글쓰기가 시의 곳곳에서 찬연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반달이 떴을까 겨자씨만 한 믿음으로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달은 태초에 말씀이었으므로
-「상현」 부분
시는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에 귀 기울이기다. 아포리즘의 글쓰기는 세계와 사물의 목소리에서 애정을 발견하는 일이다. 아포리즘 글쓰기는 시에 여백을 건설하고 창안한다. 시의 여백은 글의 문맥을 투명한 막으로 가린다. 시의 행과 행 사이에 리듬과 같은 물결을 겹겹이 흐르게 하거나, 씨앗처럼 작고 검은 눈의 치어 같은 자잘한 물고기를 풀어놓는다. 동양화가 여백의 미로 소실점의 사물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시에서 아포리즘의 글쓰기는 행간의 의미 탈락과 결손 그리고 핍진성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아포리즘의 글쓰기는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그 중심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는 발자국과 같다. 아포리즘 문장들은 파편화를 척추로 삼기에 지도가 사라진 문장들이다. 수많은 문장을 지나쳐 시간을 압축하고 함축하여 파편화된 모순과 난독의 의미로 남겨진다. 이 모순과 난독의 문장은 곧 세계의 진실이자 그 척추를 압축하여 이미지화하는 미적 효과를 발명한다.
아포리즘을 찬양하고 이를 작품에서 보여주는 작가들은 미문의 대가들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집필한 니체. 니체는 그의 저서에서 아포리즘의 글쓰기 혹은 잠언은 산맥과 산맥을 뛰어넘는 긴 발이라고 적고 있다. 그의 비유는 이렇다.
피와 잠언으로 쓰는 자는 읽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암송되기를
바란다. 산맥으로 가는 데 있어서 가장 가까운 길은 봉우리에서 봉우
리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긴 발을 가져야 한다. 잠언
(아포리즘)은 산봉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대하고 높이 자란 인간들만
이 잠언(아포리즘)을 들을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장희창 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민음사, 2004, 63-64쪽.
시에 아포리즘의 문장이 많다는 건 시인이 작품에 많은 공력을 들였다는 것이다. 한 편의 시에서 아포리즘의 문장들이 뼈대가 되어 시를 허공으로 들어 올린다. 아포리즘의 문장들은 무언가와 부딪쳐 만들어진 멍 자국과도 같다. 나를 둘러싼 세계를 순한 눈이 아닌, 맵고 꼬장꼬장한 가시 돋은 거친 눈으로 사물을 할퀴고, 맨몸으로 사물과 부딪친 이력이다. 사물의 내부까지 투시하여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 감각과 포착력이 있는 심미안이 만들어 내는 사유의 결이라 할만하다. 이 명민한 문장들은 시를 읽는 독자에게 시간에 훼손되지 않는 생의 진면목에 가 닿게 하고 고통과 기쁨의 속성을 잠언 형식의 미려함으로 독자에게 선사한다. 시편마다 아름다운 문장들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이순주의 문장 성분이라는 내용으로 시집에서 빛나는 문장을 몇 개 옮겨 적어본다. 이 시집의 뼈대 역할을 하는 문장들이며, 시인의 시적 세계관이 씨앗처럼 담긴 문장들이다. (시의 행과 연을 구분하지 않고, 채집한 시의 구절과 문장들을 옮겨본다.)
이순주의 문장 성분들
가만히 나를 뒤적거려 불쏘시개 하나 없어도 내 안의 불씨가 살아난다-「나는 가끔 풍경이 되었다」
달력의 숫자들은 날마다 어디로 가는지 묻고 싶은 날이 있다 제 몸의 반달로 밤의 표정을 만드는 반달곰 달빛의 문장으로 나는 앉아 있다-「반달곰과 시소 타기」
태초에 신이 인간에게 보내는 위로는 윙크였을 것이다 달은 한쪽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는데 한 달이 걸린다 달빛은 안녕이라는, 내게 보내는 전언인 것을 나를 너무 사용하였으니-「느린 계절은 창밖으로 지나간다」
일상이 유목의 피가 흐르는 너의 향기로 내 몸을 기억하는 것 세상 모든 초목은 꽃을 피워 제 몸의 안부를 전한다 향기를 배달하는 일은 꽃이 할 일 꽃에게 말을 걸며 물을 준다 너를 기다리며 화분에 물을 주는 건 기도다-「꽃의 사서함」
꽃은 멀리 피어 그리움을 만든다 봉합된 편지처럼 침묵하며 밖을 내다본다 꽃들의 위로를 받으며 나는 부쳐지고 있다 그대가 내게로 달려오던 속도가 이러했을까 연착도 없이 달려오는 봄 -「벚꽃열차」
유목의 피가 흐르는 당신을 듣느라 달의 문을 반만 열어놓았다-「히아신스」
타오르는 불길 바라보다 어두운 내 안이 환해질 것만 같고요-「숲 아궁이」
한 모금의 슬픔, 그 장면들이 존재의 문장들이라면 그 문장들 표절하고 싶어요 우리가 구름을 연구하는 동안 낙타가 사막을 걷는 동안, 당신 거기 있나요?//라떼 한 잔의 시간이에요-「혀들의 시간」
나무는 서 있는 게 아닙니다 하루 종일 걷고 있는 거죠 한낮의 숲에 가 보면 압니다 나무의 발자국이 보여요 하늘로 치솟은 고독이 제 키만 합니다.-「한낮의 숲에 가 보면 압니다」
활짝 피어난 꽃들은 세상 모든 여자의 아름다움을 가져가 피어난 것이다 목련을 바라보지 마라 바라보는 순간 늙을 것이다 벚꽃을 바라보지 마라 꽃처럼 이내 질 것이다 해마다 꽃을 피운 것뿐인데 봄날이 다 늙었다 –「꽃들의 배후」
불빛들이 마음 환히 밝혀준다면 꽃밭인 게 분명하다-「저녁이 아름다운 건」
둥근 열매들은 공중에 매달려 종을 울리고 창문을 두드리는 바람은 누구를 부르는 소리일까 사과는 그의 영혼이었다-「사과가 왔다」
살펴보았듯이 이순주 시집에서 발견되는 문장은 의미의 파편화로 독특한 문양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문장들은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와 시적 지향점으로 응집하고 있다. 그 핵심은 자연과의 직접적 소통과 ‘생의 유한성 자각’이라는 각성을 통해 “영원” 혹은 “불멸”이라는 초월의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2. 나는 문자들과 결별하여 영원으로 향하는 것이니
시집에서 아포리즘 글쓰기와 더불어 또 하나의 특징은 “~을 읽는다”와 “결별한다”라는 행위이다. 두 개의 서술어는 의미상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시집에서 “읽는다”란 서술은 결별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시적 화자가 “글자, 문장, 전언”을 “읽는다”가 곧 나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기에, 글자를 읽고 글자와 결별하는 과정을 반복해야만 나와 만날 수 있으며 영원이나 불멸의 세계로의 진입이 가능하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적 화자가 읽는 “글자, 문장”의 발신자와 문장에 내재한 진의는 무엇일까? 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발신자는 “숲, 나무, 새, 바람” 등의 자연물이며, ‘나’는 그들의 전언을 해독하여 삶의 진리를 수신하고 있다. 이처럼 변화무쌍한 자연의 변화를, 자연이 나에게 발신하는 전언으로 파악하여 수신한다는 시적 구성은 시집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의 플롯이다. 즉, 나와 자연과의 관계 설정과 시적 화자의 발화 방식을 통해 이순주의 시집이 물활론적 인식론을 기반으로 자연을 수용하고 자연과 합일하려는 시인의 의지를 확인 할 수 있다.
무수한 글자들과의 결별로 나를 만났으니
이제 나를 떠날 말들이 먼 곳의 길을 묻는다.
나의 말들에 신발을 신기면 영원을 걸어갈 수 있을까?
나를 건너고 생각을 건너온 시간들,
생각해보니 나를 찾는데 나를 너무 사용하였다.
하루하루 노을을 물들이고 별들로 장식했으니
나를 건넨다.
- 「시인의 말」 전문
독자가 시집에서 처음 부딪히는 문장은 시집의 첫자리에 좌정한 「시인의 말」이다. “시인의 말”에서도 “~읽는다”라는 독해 행위가 은유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순주의 시집에서 “~읽는다”라는 서술어는 중요한 핵심 키워드이자 시집의 주제를 강화하는 요소이다. 왜냐하면, “나”가 자연물이 발신하는 전언을 ‘읽는’ 것은 곧 나를 만나기 위한 과정이며 “불멸”이나 “영원”에 닿기 위한 조건이다. 내가 나를 만나는 데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 ‘글자들과의 결별’이다. 나를 찾기 위한 “나”의 의지는 “무수한 글자들과의 결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때 “문자와의 무수한 결별”은 과거의 삶을 반추하고, “나를 너무 사용”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이 과정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일회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사 문자들과의 결별을 통해 “나를 만”났다 해도 결국 “글자”들은 다시 “먼 곳의 길을” 향해 “나를 떠날 말”이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결별이 과정은 종결점이 사라진 행위이다. 자연이 내게 전하는 문장과 글자를 읽는 행위와 결별의 반복은 “나를 건너고 생각을 건너온 시간”으로 또는 “나”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확장되고 있다.
나를 또다시 떠나갈 “나의 말들에 신발을 신기면 영원을 걸어갈 수 있을까?”라는 시인의 질문에서도 글자들과의 결별이 곧 나를 찾아가는 수행처럼 힘든 과정이며, 그 험난한 과정을 통과해야만 나는 “영원”이라는 영원불변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다고 자문하고 있다.
이때 시인이 도달하려는 종착지가 “영원” 혹은 “불멸”의 세계임을 유추할 수 있다. 다소 관념적이기도 한 “영원”과 “불멸”이 표상하는 세계는, 유토피아적 속성을 지닌 곳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인의 고백은 “비애가 새(글자)가 되어 날아갈 수 있을까요/새(글자) 날아간 자리 빈 둥지만 남아 또다시 새(글자)가 깃드는 게 삶일 거예요(「둥지」)”라는 시 구절과 연동되고 있다. 나를 만나는 ‘과정’이 하나의 수행 과정이며, 나를 둘러싼 껍질을 깨는 파각(수행과정) 이후 나는 비로소 이전의 나와는 다른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기 때문에, 시집 전편에서 등장하는 “글자들과의 결별”은 곧 새로운 나의 확장성을 견인하는 동인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의 각성과 “영원”이나 “불멸”이라는 낯선 세계로의 진입은 수행과도 같은 고통스러운 과정이 전제되어야 함을. 그리고 시인이 이 과정에 얼마나 고뇌하고 집중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종착지인 “영원”의 세계는 신이라는 불멸의 대상, 혹은 유토피아적인 천상의 세계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글자, 문장, 전언, 낙서, 필법, 서간” 등은 나의 내면 성숙 과정의 표상으로도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맨 처음 고구마는 내가 읽을 수 없는 문장이었다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는지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싹들은 고개를 내밀고
전언은
주둥이가 넓고 엉덩이는 큰 화병에 고구마를 넣고
물을 주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고 싶은 말 가슴에 묻고 오죽 답답했을까
화병의 심장이 된 고구마,
제 몸을 온전히 잎들에게 내어준다
화병의 날개 같은 잎들이 자란다
하트 모양 둥근 잎들이야말로 내게 하는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
나는 화병과 뜻을 같이하기로 한다
줄기들 창문을 붙잡고 기어오르는
저 날갯짓,
사는 일은 안간힘을 다해 비행을 꿈꾸는 일이 아닌가
-「잎들의 아침은 화병 속에서 걸어 나온다」 전문
시에서 나는 방치된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자란 “고구마 잎”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기발하게도 고구마 잎을 “문장”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고구마 잎”이 내게 전하는 암호와도 같은 메시지를 쉽게 해독하지 못한다. 대신 고구마를 화분에 옮겨 심고 “화병”의 마음으로 고구마에 물을 주고 있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고구마를 가꾸던 중, “줄기들 창문을 붙잡고 기어오르는” 고구마 잎을 “날갯짓”으로 파악하여 “하트 모양 둥근 잎들이야말로 내게 하는/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으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곧 “사는 일은 안간힘을 다해 비행을 꿈꾸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고구마 잎과 교감하고 있다. 즉 고구마 잎이 가닿으려는 곳이 천상 즉 우주적인 세계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시인의 말”에서 시인이 문자들과의 결별을 통해 도착하려는 “영원”과 동일한 속성을 지니는 세계로 볼 수 있다. 이처럼 고구마 잎에서 전언을 읽어내는 “나”의 행위는 자연물과 소통하려는 시적 화자의 적극적 의지의 표명이며,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연을 우위에 두는 인식의 정황을 표출하고 있다.
어제 내린 비의 배후는 그리움, 먹구름에서 꺼내 쓴 필법이지 빗물은 뿌리 속 스며들어 꽃을 피우지 낙서는 생성의 뜻이고 마음을 베껴 쓰는 것, 대상을 땅 위에 그려내는 것
산천초목 우거지지 너무 서두르지는 말아 거센 바람은 동반하지 말고, 되뇌이지 세상을 스무 번 사랑하고 나를 스무 번 사랑하지 마음은 언제나 서녘에서 서성거려 창문 너머 왁자한 새 떼가 보이고
벚나무는 연분홍 꽃치마를 둘러 입었네 문득 엄마가 생각나는 거야 바람이 불면 꽃가루 흩날리지 그것이 희디흰 눈물인지 서럽게 우는 눈물인지 몇 해 전 새가 되어 날아간 당신 만나는 노을 역이지 해가 지구를 탑승하고 마지막 정거장에 멈춰서는 시간이야
(…중략…)
오늘 죽어 나는 내일 다시 태어나지
-「밀서」 부분
「밀서」 역시 “필법, 낙서”와 이를 읽는 ‘나’의 행위가 시의 중요한 핵심 서사이다. 동시에 이 서사는 비극적이다. 이 비극성은 “나”의 과거 경험에 기인하고 있다. 시에서 나타나는 시간적 구성을 살펴보면, 현재에서 과거 회상으로 그리고 현재를 오가는 역순행적 구성을 취하고 있다. 제목인 “밀서” 역시 그 비밀스러움으로 시적 구성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시에서 “밀서”는 “비, 먹구름, 꽃, 벚나무” 등 자연 사물에 의해 기록된 문장들이다.
밀서는 곧 어머니의 부재와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 “비, 구름, 꽃, 바람, 나무, 숲”이 나에게 보내오는 전언은 “몇 해 전 새가 되어 날아간” 어머니가 내게 전하는 사랑의 전언인 셈이다. 어머니의 장례식 중, 숲에서 들려오던 뻐꾸기 울음소리를 ‘나’는 현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로 인식하는 물활론(物活論)적 세계관을 선보이고 있다. 자연에 관한 경배와 자연과 합일하려는 물활론적 인식은, 시에서 자연의 변화무쌍한 변화를 어머니의 서신으로 파악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너무 서두르지는 말아 거센 바람은 동반하지 말고”라는 구절 역시 어머니의 사랑을 전달하는 자연의 어법이며, 자연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시적 구성을 선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순주 시인의 시 세계에서 물활론적 인식은 타 시인과 어떠한 차별성으로 부각되고 있는가? 자연과 시적 화자의 독특한 관계 설정과 직접적 소통이라는 시적 화자의 발화 태도는 곧 인간탈중심의 사유가 그 배경에 있다. 「시인의 말」과 시집 전편에 등장하는 개성적인 시적 구성과 자연을 읽어내고 문자들과 결별하려는 시인의 의지 또한 시에 관한 시인의 진정성과 시의 완성도를 향한 집념의 시 쓰기 혹은 글쓰기 행위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3. 구석의 힘과 물활론적 세계관
시집의 표제 시인 「어떤 계절은 구석에서 시작된다」는 우선, 시 제목이 눈길을 끈다. 어둡고 후미진 구석에서 계절의 변화가 시작된다는 시적 발견이 신선하다. 그렇다면 구석은 왜 새로운 계절이 탄생하는 곳일까? 그리고 새로운 계절은 어떤 힘을 내장하고 있는가. “구석”에 관한 시인의 인식 경로를 따라가 보자.
나는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먼지
나의 계절은 구석에서 시작된다
구석은 나의 비빌 언덕,
소라게처럼 떠돌다 만난 불멸의 집 한 채
여기까지 걸어온 모든 궁리가 구석에서 나온 것이었으니,
나는 구석에 앉기 위해 하루를 서둘러 집에 당도하곤 한다
나를 앓는
구석에도 감정이 있네
때로는 음악이 흐르고
그 저녁은 내가 시암 고양이 암컷처럼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쌓인 모래를 털어놓는 시간
나의 입 틀어막으며 제 말만을 늘어놓는 연필 한 자루의,
비밀한 숲의 속삭임을 듣는
빈 커피잔은 적막을 들이마신다
영혼을 들여다보며 다듬기도 하는
무엇이든 거듭나게 하는 구석의 마법!
내 희망은 그곳에서 자라고 있었으니
그러므로 집구석에 앉아 뭐 하는 일 있느냐고 하는 말은 구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오늘은 시장 골목 난전에 앉아 냉이랑 달래를 파는 노인에게서 봄을 한 봉지 사 왔다 냉이된장국을 끓여 구석에도 봄 냄새를 한껏 풍기리라
마음먹은
구석에서부터 나는 시작된다
-「어떤 계절은 구석에서 시작된다」 전문
시에서 먼저 ‘나’에 관한 정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먼지”, “구석에서 모래를 토해내는” 무용(無用)하고 비루한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그렇기에 “나의 계절” 역시 “구석에서 시작” 될 뿐이다. 시적 화자의 발화 태도로 보아, 나는 구석에 은신한 하찮은 존재이며 완성되지 못한 미완의 상황에 부닥쳐 있다. 그 때문에 나는 타인에게 어떠한 권력의 힘이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권력의 자장에서 비껴있는 존재이다. 나는 민달팽이처럼 나를 보호해 줄 외피를 지니지 못한 연약한 살갗만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에게 구석이란, 권력의 횡포와 폭력에서 나를 방어할 수 “비빌 언덕”이며 위안과 휴식의 공간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구석”이 초라하고 누추한 곳으로 속성이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가 전개되면서, 구석은 그 속성이 변모의 양상을 취하고 있다. “구석”은 내가 “소라게처럼 떠돌다 만난 불멸의 집 한 채”, “감정이 있”고 “때로는 음악이 흐르”는 곳으로 소외와 불안의 공간이 아닌, 오히려 정서의 교류가 가능한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구석”은 소외의 상징이 아닌 “영혼을 들여다보며 다듬기”가 가능한 재생의 속성으로 확장하고 있다. “무엇이든 거듭나게 하는” 존재 탄생이 지속적으로 행해지는 “마법!”적인 신비한 “불멸”의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때 “무엇이든 거듭나게 하는” 구석이란 소외되고 후미진 구석에서 “내 희망은 그곳에서 자라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구석에서부터 나는 시작된다”라는 존재의 각성이 시도되는 곳으로도 변주되고 있다.
확성기는 1톤 트럭 앞에 달려 있다
동네 골목을 빠져나가는 내 꽁무니를 졸졸 따라 나오며 나를 호명한다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고 또박또박 끊임없이
오이 고추 당근 양파 마늘 상추 미나리 시래기나물 무말랭이 사과 배 토마토 자반고등어 가자미 밴댕이……
그건 지상에 많은 내 이름들
나는 어쩌면 한 개의 사과나 시금치를 먹기 위해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일생 내 위장을 통과한 무치고 끓이고 볶은 것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게 아닐까
내 삶을 숟가락질한 날들아,
꼬박꼬박 먹기를 거르지 않은
하루 세 끼의 밥상이다 나는,
-「골목길은 소화 중이다」 부분
‘나’가 구석과 골목길에 집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시적 화자의 진술을 통해, 시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석과 먼지, 골목길 등의 시어가 시의 주제를 이끄는 소재임을 눈치챌 수 있다. 앞의 시에서 ‘나’가 ‘구석’이라는 후미진 곳에 기거하는 존재이며, 소라게처럼 떠돌다 만난 불멸과 같은 집 한 채로 확장하는 이유 역시 이 시에서도 동일하게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에서 골목길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트럭의 확성기는 다양한 사물을 호명하고 있다. 호명되는 것들의 이름은, “오이 고추 당근 양파 마늘 상추 미나리 시래기나물 무말랭이 사과 배 토마토 자반고등어 가자미 밴댕이” 등이다. 특이하게도 ‘나’는 트럭의 확성기를 통해 “호명”되는 세목이 “지상” 위의 “내 이름”과 같은 “많은” 다양한 존재로 진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골목에 호명되는 것들이 바로 내가 먹은 음식인 탓에 내 삶의 이력이며 나와 동일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 존재라는 점이다.
동시에 트럭 확성기를 통해 호명되는 존재들이 탄생 지점이 “구석(골목)”이라는 시적 발견에 있다. 이러한 시적 발견은 내가 먹고 소화한 것들이 나의 신체 속에서 에너지가 되고, 나의 삶의 활력으로 샘솟듯, 먹거리의 이름이 호명되는 골목길 역시 재생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 때문에 골목길 혹은 구석은 비루한 것들의 거주하는 곳이 아니라, 온갖 사물과 사람들이 한데 뒤섞여 생명이 탄생 되고 삶의 활력이 넘치는 “불멸” 혹은 “영원”성을 지닌 우주적인 탄생의 공간이 되고 있다. 이러한 시적 발견은, 골목 혹은 구석이 권력의 힘을 무력화하는 전복의 힘을 내재한 공간으로 탄생하고 있다.
시에서 구석이 지닌 전복의 힘은, “시인의 말”에 쓰인 내용을 독자에게 다시 환기하고 있다. 앞서서 언급했던 “문자들과의 결별”과 이 시에 나타난 “내 위장을 통과한 것”들은 모두 나를 만나기 위해 거처가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일생 내 위장을 통과한 무치고 끓이고 볶은 것들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게 아닐까”라는 진술에서도, 나를 만나는 과정이 곧 실존에 관한 질문임을 공유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같이 이순주의 시집은 나를 만나는 행위 혹은 실존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를 ‘과정’의 속성으로 파악하는 시적 사유를 표출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곧 이 시집의 주제로 응집되어, “구석”이 지니는 고정관념을 파괴하여 “구석의 전복성”을 강조하고 있다.
“골목길, 구석, 먼지” 등의 시어들은 후미지고 소외된 공간을 상징하는 속성에서, 감정이 흐르는 곳, 불멸의 집 한 채 등으로 소통과 영원의 속성을 지닌 의미로 확장되고 있다. 이로써 “구석”은 “영혼을 들여다보며 다듬기도 하는” 곳이며 “무엇이든 거듭나게 하는 구석의 마법”을 통해 고정관념을 부수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봄의 희망과 같은 역동적인 힘이 내재한 생성의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시에서 “구석”은 “불멸, 영원” 등의 생명 탄생 공간인 동시에 권력의 힘을 와해시키는 전복성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처럼 이순주의 이번 시집은 감각의 결합과 전이, 탈인간 중심의 물활론적 세계관과 “구석”의 전복성을 강조하는 귀한 시집이다. 이순주 시인의 시집에서 펼치는 다양한 실험성과 시적 세계관은, 우리에게 자연을 재생과 불멸과 영원성의 공간으로 목도한 헤르만 헷세의 문장을 소환하게 한다.
“나무는 우리보다 더 오래 사는 것처럼, 생각이 길고
호흡이 길고 차분하다. 우리가 나무의 말에 귀 기울이는
한, 나무는 우리보다 현명하다. 우리가 나무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우면 어린애같이 서두르는 짧은 소
견과 유치한 성급함을 지닌 우리도 비할 바 없는 즐거움
을 얻는다. 나무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
은 나무가 되려고 갈망하지 않는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오로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
이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헤르만 헷세 저, 배명자 역, 「나무」,
『정원 가꾸기의 즐거움』, 반니, 2022, 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