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장 시인의 시읽기
언어의 연산능력에 따라 작품의 질이 결정된다
이오장(시인)
언어는 끝이 없고 무한한 영역과 마주하여 발전과 소멸을 거듭한다. 현재에 사용했던 언어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언어의 탄생으로 이전의 언어는 소멸하고 거기에 따른 이미지도 변하여 새롭게 생성되는 것이다. 언어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의 본질이다. 따라서 언어는 유한한 수단을 무한히 활용해야 하며 언어와 사고를 일치시키는 능력을 통해 진화한다.
인간이 하등 동물과 다른 점은 대단히 복합적인 소리를 생각과 결부시키는 능력이 무한정하기 때문이다. 모든 언어는 계층적 구조를 갖는 표현의 무한집합을 제공하며 각각의 표현은 외적 표출을 위한 감각 운동이고 사고처리를 위한 개념과 의도의 접합면이다. 이런 기본특성을 설명해 주는 것이 연산 처리다. 언어의 이론은 생성문법일 수밖에 없으며 개개인의 주관과 사고방식 안에 갖고 있는 대상을 다룬다. 겉으로 표현된 발화나 사회적 현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개인적 내재적 내포적인 것과 외재적 사회적인 것의 차이는 연구적인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현상을 생물학에서 추상하는 수준으로 기록하고 기본 특성을 충족시키는 연산 능력에 따라 인지적으로 된다.
시인은 언어의 연산 능력에 따라 작품의 질이 결정된다. 어떤 사물에 대하여 무엇을 상상했다면 그 상상에 상상을 더하여 또 다른 언어를 합성시키는 능력, 그것이 시를 쓰는 능력과 직결된다. 따라서 시인의 기본자질은 언어의 기초를 얼마나 습득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렇다면 어떤 언어를 찾아야 연상되는 언어를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체험의 언어다. 체험의 순간에 고통을 당하든가 큰 슬픔을 맞았다면 순간적으로 삶의 회의를 느끼는데 그때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고 그 고민이 새로운 출로를 찾게 한다. 그 출로의 방향이 연산의 작업에 들게 하는 것이다. 이에 시인의 자세는 어떤 사물과의 대화뿐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는 느낌으로 배합을 이뤄 새로운 언어의 맛을 찾아야 한다. 많은 시인이 존재하지만, 이것을 파악하고 시를 쓰는 시인은 없다. 느낌에서 얻은 감성에서 한 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순간의 영상만 포착하는 것이다. 이는 훈련에서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그런 자세를 유지한다면 극복되는 일이다.
시 한 편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을 그런 자세로 유지해야 순간적으로 쓸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말이다. 인천 펜은 국제 펜 한국본부에서 활동하는 것과 아울러 지역문단을 위해 인천문단의 발전을 이끌어 오고 있다. 따라서 지역 출신문인들과 타지역에서 이주한 문인들이 합심하여 지방의 어떤 문단보다 활약상이 많다. 동안 각 언론에 발표한 인천문인의 작품 11편을 선정하여 특집으로 엮는다.
홍예문
서봉석
홍예문은
열고 닫아야 하는 문짝도
걸고 풀어야 하는 빗장도 없다
어린 내가 지나가도 그득했고
젊은 날로 서성거려도 늘 다정하다
서해 갯 냄새가
슬픔으로 기쁨으로도
바람 불려 다니고, 때때로
외가 오가던 길
어머니 손잡고 지나다가
"엄마"하고 소리치면
찬 돌에도 더운 맘은 있는지
"얘야" 하고 대답하던
우리 메아리가 살며 정든 곳
불현듯, 그 어리광이 그리워
일부러 찾아가 다시 불러 보니
이젠 웬 늙은이의
목 쉰 목소리 혼자 덜렁거릴 뿐
서로 정 나누던 애틋함이 없다
홍예문도 한참 작아진 키로
함께 놀던 옛날은 잊어버리고
돌벽 움켜쥔 담쟁이가
옛 사진처럼 푸르기를 바라지만
애꿎게도 단골이 된 식은 바람만
애간장에 옛날을 안아보다 간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는 죽을 때가 되면 머리를 굴 쪽으로 둔다는 말이다. 사람도 삶을 위하여 떠돌다가도 마지막에는 고향으로 향한다는 뜻이 된다. 자신이 낳고 자랐던 고향은 삶이 끝날 때까지 영향을 준다. 잠시도 잊지 못하고 꿈을 꿔도 고향을 무대로 펼쳐진다. 삶의 과정에서 시간적으로나 순서상 맨 앞에 놓이는 부분은 가장 중요한데 사람에 있어 고향은 처음 시작한 곳이므로 절대적인 우선이라 할 수 있다. 서봉석 시인은 인천에서 태어나 타지에서 떠돌다 인천으로 돌아간 대표적인 향토 시인으로 인천을 품고 인천을 사랑하는 시인이다. 인천은 대표적인 항구도시로 근대화의 첫걸음을 시작한 곳이다. 최초의 개항장, 최초의 철도, 최초의 우정국, 최초의 호텔, 최초의 조계지, 최초의 외국은행, 최초의 외국인 별장, 학교 등등 수많은 최초의 수식어가 붙은 근대문명의 시작점이다. 그중 홍예문(虹霓門)은 일본의 착취와 한국인의 정서를 파괴한 구조물이다. 일본 조계지의 영역을 확대할 목적으로 만석동의 혈을 뚫어 을사늑약의 목적을 실행한 통행 터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혈문(穴門)으로 불렸다. 일본에 의해 완전히 국권이 사라진 경술국치의 두 해 전인 1908년에 공병대에 의해 개통되어 만석동과 송월동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여 지금도 완전하게 보존된 치욕의 구조물이다. 시인은 바로 그 부근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삶의 전부에서 지울 수 없는 장소다. 삶의 터전을 돌고 돌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여 문짝이 없고 빗장도 없는 홍예문에 서서 옛날을 그려보니 이제는 웬 늙은이가 담쟁이를 바라보며 서성거린다. 삶은 이동 수단이 발달하면서부터 더 힘들어진다. 기차가 생기면서 타지를 알게 되고 문명의 발달만큼 욕망이 커져 타향으로 떠나게 한다. 하지만 고향은 기다려 주다가 마지막을 품어준다는 것을 절실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한 여름 밤의 단상. 2
-이필우 作
그립다는 건
외로움의 껍질일까 알맹일까
사랑한다는 건
미움의 본질일까 종말일까
속절없이 나이 먹어
일상을 허둥대고 나면
거울 속에 빛바랜 나이테만 쌓여가고
스쳐 가는 시간 속에서도
언뜻 언뜻
그리움의 불꽃이 일어난다
사무치게 설레는 그리움
한여름 밤 별빛으로 식혀보지만
영혼 깊숙이 피어오르는 사랑의 영상
깊은 어둠에 펼쳐진다
그립다는 건
사랑의 알맹이
사랑한다는 건
그리움의 본질인가 보다
동물의 약육강식 법칙에는 반드시 천적이 존재하며 식물의 생존방식에도 햇빛과 그늘의 영역을 만들어 다른 식물의 생존을 막는다. 사람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정신적인 영역이 존재하여 마음속 깊숙이 품은 감정을 상대방에게 전하고 함께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사랑의 감정이 아니라도 막연한 감정의 공감을 원한다.
신체의 접촉이 이뤄지기 전에 마음의 접촉은 시작되고 신체와 마음이 하나가 되었을 때 통합의 영역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정신이 먼저 닿기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되는 부작용이 생긴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움이라 부르며 너무 과하면 외로움이 되고 더 나가면 우울증을 앓게 된다. 이것에는 남녀노소가 없어 신체가 노화되었어도 정신만은 더 뚜렷이 기억하며 그 고통은 본인만 아는 것이지만 대부분이 겪기 때문에 동병상련으로 서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당사자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아무도 간섭하지 못하고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것이 보통이다. 이필우 시인은 한여름 밤에 그리움의 병마와 싸우며 왜 그리움이 일어나 고통의 시간이 되는 가를 고민하고 있다. 그립다는 것은 외로움의 껍질일까, 알맹일까. 그리움의 원천인 사랑은 미움의 본질일까 종말일까를 반복하며 젊은 시절의 회상으로 열대야를 견딘다. 불꽃같던 청춘은 이미 지났고 몸과 마음이 피곤한 황혼기에 불현듯 일어나는 그리움을 밤하늘의 별빛에 비춰보지만 어둠에 펼쳐지는 지난 사랑의 영상은 혼자만의 착각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그러다가 그립다는 건 사랑의 알맹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고 사랑이야말로 그리움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삶의 희망이 강할수록 그만큼의 그리움이 쌓이고 희망이 없다면 그리움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인의 아름다운 늙음이 부럽다.
줄
-김운중
내 영혼 한가닥은
낙동강 한 끝
메봉산 기령산
호미 든 세세년년
양반골 조상
공자왈 맹자왈
열여섯 천리 한양
이어진 철길
혼자 만든 새길
한 갑자 마신 강물
핏줄로 이어
남은 한점 예교(손녀)
한 사람의 생은 줄로 이어진다. 인연의 끈으로 묶여 자신도 알 수 없게 삶은 진행되고 끝내 무엇이 남는지를 모르고 생을 마친다. 부모의 피를 이어받아 자신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삶은 자연스럽게 사회와 어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삶을 이뤄간다. 줄은 이어지는 끈이지만 연연히 맺어지는 삶의 테두리를 만드는 인연을 말한다. 가족관계를 떠나 나와 타자와의 관계, 나와 사회와의 관계 등 많은 줄로 연결된 삶은 줄을 제대로 잡았는가에서 시작되고 결과를 만든다. 잘못 잡든가 잡지 못한다면 어느 한곳에 머무르다 흔적 없이 마무리하는 것이다. 삶은 그래서 어렵고 힘들어서 이겨내지 못하면 외톨이로 남아 끝내 좌절을 겪는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같아서 어떻게든 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게 되고 억지로 만들기도 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그런 줄에서 무엇이 가장 바른 줄일까를 생각하면 가족의 줄이다. 억지로 놓지 못하며 끊지도 못하는 줄은 가족뿐이라는 것이 증명한다. 김운중 시인은 3.4.5.6의 정형 민조시를 쓰는 시인이다. 일정한 틀에 맞춰 시를 쓰는 것은 쉽지 않고 이미지의 전달이 어렵다. 한데 삶 전체를 일정한 글자에 맞춰 풀어냈다. 짧은 문장에 지난 세월의 발자취와 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낙동강 한쪽 끝 매봉산을 바라보며 기령산이 뒤를 감싼 고장에서 태어나 공자, 맹자를 배우고 익히다가 16세에 상경하여 새로운 문명을 배우고 일가를 이뤘다. 한 갑자의 삶을 서울에서 이뤄낸 것이다. 이것만으로 자랑할 만한데 새롭게 이어진 후손의 줄을 잡았다. 한 사람의 생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거룩하다. 여기에 자수성가를 합친다면 그 높이는 더해진다. 정형의 문장에 짧고 쉬운 언어로 자신의 삶을 펼쳐낸 시인의 삶은 고달팠지만 자랑할 만하지 않은가.
삶의 의미
-김원배 作
어제도 그러했듯
내키지 않는 길로
발걸음 재촉하고 있다
어느 절친한 벗은
요란한 세상이 싫어
일찍이 산속으로 도망쳤지만
나는 아직
나의 길이 너무도 멀기에
끝없는 길을 걷고만 있다
바로 앞이
멈춰야 할 곳임에도
손끝에 잡히지 않는다
만사가 부정보다
긍정이 많다기에
늙어가는 것도 서러워
나와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삶의 의미를 정의한다면 한계가 없다. 사람의 삶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만큼의 길에 도달하면 멈추는 한정된 삶이다. 그런데 왜 삶의 정답이 없는 걸까. 전부가 정답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정답인데 그걸 물어보니 뭐라 대답할 말이 궁하고 먼저 자신의 삶을 얘기한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 다른 사람이 따라오기를 바라고 자신이 아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여 정답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 부정하게 된다. 생각, 즉 뇌의 활동으로 움직이는 사람의 한정된 삶이 자신 외에는 전부 부정하여 일어나는 현상이다. 역사상 삶의 정의를 내린 사람은 손꼽을 정도다. 하지만 따르는 추종자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정의하지 못했다는 것은 종교인이라도 수긍한다. 왜냐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정의도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생각해 보면 사람의 삶은 단순하고 아무리 과학이 발전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다. 다만 개개인의 생각대로 정의하고 그만큼의 노력으로 살아간다. 김원배 시인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안고 사는 삶의 정의를 말한다. 하지만 다르다. 내키지 않는 지루한 삶 속에 발걸음을 재촉하고 일찍 떠난 친구도 있지만 자신의 길은 아직 멀다고 자부하고 어떻게든 다르게 살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부정보다는 긍정이 많고를 떠나 더 진실하게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서럽다. 사람의 삶은 왜 정해져 있는가. 어떻게 하면 더 늘려서 자연과 함께할 것인가를 늘 고민하며 자신과 싸움에 열중한다. 어차피 정해진 삶을 이기는 것은 자신과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단순하지만 철학적인 삶의 결론에 다다른 시인이 부럽다.
아름다운 도둑들
-박영옥
꽃피는 봄날의 환희
푸르른 여름날의 젊음
무지갯빛 가을의 성숙함
은빛 계절의 화려함
황홀한 계절의 선물을 안고서
아양을 떨어가며
번갈아 드나들더니
내 젊음을 아름다움을 정열을
조금씩 아무도 몰래
훔쳐 가고 있었다
세월의 심부름꾼 아름다운 도둑들
언젠가 그날이 오면
내 심장의 고동소리마저 훔치러 오겠지
그때 모른 척 눈감아 주리라
도둑은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사람을 말하는데 대부분 나쁜 의미의 대명사다. 내가 없어서 남의 것을 훔치고 빼앗는 것은 나쁘다. 그러다 버릇처럼 훔치는 게 직업이 된다면 그때부터는 사회의 악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며 격리된다. 물품이나 금전을 훔치는 것 말고 다른 도둑이 있다면 그건 마음을 빼앗는 사랑의 도둑이다. 그런 도둑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훔치는 재주가 많은 것이 아니라 사랑의 감정으로 서로 주고받는다. 그러나 국민의 마음을 훔쳐 정권을 잡은 후에 자기의 욕심만 차리는 도둑은 물건을 훔치는 도둑보다 더 나쁘다. 최고의 도둑은 당연히 정치인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도둑이 있다. 자식들이다. 엄격히 말한다면 도둑이 아니라 강도다. 자식은 부모에게서 모든 것을 물려받는다. 사랑을 떠나 육체적인 헌신까지도 요구한다. 그래도 부모는 다 준다. 박영옥 시인은 그런 도둑들을 아름답다고 한다. 그렇다. 최고로 아름답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낳고 기른 자식들이다. 자식은 젊음을 빼앗아 가고 무지갯빛 성숙한 아름다움도 앗아간다. 보이지 않게 젊음의 정열을 가져가지만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게 부모다. 박영옥 시인은 이렇게 자식들을 아름다운 도둑이라고 엄살을 떨다가 갑자기 변한다. 그 도둑들을 세월이라고 부른다. 야금야금 세월을 보내며 젊음을 앗아가더니 어느 날 갑자기 심장의 고동소리마저 앗아갈 시간, 그때는 모르는 척 눈감아 주겠다고 한다. 그렇다. 시간은 아름다운 도둑이다. 생명을 주고 터전을 줬다가 어느 날 갑자기 빼앗아 버린다. 그런 시간을 시 한 편으로 그려낸 시인은 진정 아름답다.
대문
-심정자
온몸에 잎이라도 틔울 듯 버티고 있지만
스치는 바람에도 흔들리며 신음하고
흙벽도 무너지기 직전인데
다시 찾아온 봄날은 눈이 부시어
마당은 하늘에 시선을 머문 채 햇살과 노닐고 있다
세월은 쇠도 갉아먹는구나 하다가도
"다시 생각하니 높고 또 꽃이다“
거센 바람이 지나가며 발길질하는 날이면
덜컹 열리는 기척, 그것마저 반갑다
코 흘리게 아이들이 이사 와서 처음 만났다
아이들도 나이가 들어 둥지를 틀고 떠났다
노파만 혼자 남아 겨우 문턱을 넘나든다
그녀의 경첩도 대문의 틈새도 벌어졌다
대문은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고 있을 거다
내가 먼저 주저앉지 말아야지.
문은 소통이다. 안과 밖으로 나뉜 경계에서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이며 나를 가두는 담장에서 안으로 끌어드리기 위한 창구다. 문이 없다면 담장만 남고 담장은 그대로 주저앉을 때까지 불통이다. 따라서 문이 없는 집에 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수도자들도 소통의 창구가 없다면 수도의 결과는 없다. 득도를 이룬다는 것도 결국에는 사람답게 살기 위함인데 안에서 이룬 것을 밖으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다. 그런 문이 항상 열려있다면 이상하고 항상 닫혀 있는 건 더 이상하다. 반드시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요즘 항상 열려 있든가 아니면 닫혀 있는 문이 많다. 농촌의 이주 현상이다. 농촌에 가보면 그런 문을 많이 볼 수 있다. 심정자 시인은 농촌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도시의 변두리쯤 도농 접합지역의 낡은 대문을 말한다.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곳에서 낡아버린 대문을 본다. 그 집은 그곳으로 이주했을 때부터 있었고 아이들이 드나들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아이들이 보이지 않더니 차츰 문 여닫는 소리가 사라지고 겨우 문턱을 넘나드는 노파만 남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람에 맞서는 모습만 보여준다. 그 모습에서 쇠도 갉아먹는 세월의 무상함을 보았다. 당장 주저앉아도 새롭지 않을 것 같은 대문 앞에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말하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먼저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인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다. 혼자 중얼거리는 낡은 문은 세월을 받아들인 흔적이고 그것을 듣는 화자는 세월을 승화시키겠다는 다짐이지 않은가.
선
-정경해
그어진 대로
똑바로 가면 되는데
머뭇머뭇
불쑥불쑥
생각이 많아
비틀비틀
중심을 잃고
가야 할 곳
있어야 할 데를 몰라
찾아 헤매는
선線
선善
선先
바닥에 금을 긋고 계속 이어가면 그 자리에 돌아온다. 선은 둥글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선은 직선으로 뻗어 곧바로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선線은 원의 가닥으로 시작과 끝 우리의 삶을 이어준다. 이에 비하여 선善은 사람의 품성을 말하는 것으로 선하게 살아야 진정한 인간성을 갖출 수 있다는 가르침의 대명사다. 성악설은 철학의 중요 소재로서 인간은 원래부터 악했는데 살아가다 깨우쳐 선하게 된다는 학설이며 성선설은 인간은 원래부터 선했으나 살아가며 모진 풍파를 만나 살기 위한 수단으로 점차 악해진다는 설이다. 둘 중 무엇이 옳은지는 결말을 낼 수 없는 주장으로 어떻게 설명해도 옳다. 그만큼 인간의 삶은 격변이 심하고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설명한다. 정경해 시인은 이런 선의 이해력을 높이는 작품으로 선線과 선善 또 하나의 선先을 재미와 철학을 곁들여 그려냈다. 선先은 앞서 배운 사람을 일컫는 말로 후학을 가르친다는 의미다. 우리말의 음은 뜻을 따르지 않는 소리 말로 의미는 다르지만 글자는 같아 헷갈리게 한다. 시인은 이런 것에 중점을 두고 선을 써 내려가며 삶의 시작과 끝을 향한 의미를 찾는다. 똑바로 가면 되는데 머뭇거리고 생각이 많아 무엇을 어떻게 할지를 모르다가 선을 따라간다. 가야 할 곳, 있어야 할 곳을 헤매는 일은 누구나 같다. 그렇지만 도달한 곳은 언제나 같다. 진리를 찾든가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헤매지 않아도 시작한 곳으로 돌아온다. 이게 선의 정의다. 시인은 그것을 찾는데 시간을 많이 소비했을 것이지만 끝내 삶의 끝을 바르게 돌려놓았다.
미인을 기다리며
-한기홍
오늘도 미인을 기다린다
송충이 눈썹에 등잔 같은 눈동자
맷돌 닮은 콧잔등
늙은 호박덩이 입술을 가진
오늘도 미인을 기다린다
걸쭉한 육담에 정겨운 삿대질
시원스런 몸짓하며
세월의 못이 박힌 손바닥을 툭툭 치는
오늘도 미인을 기다린다
아득한 산모퉁이 철쭉꽃 핀 오두막에서
고기 굽는 연기 솔솔 피우며
내 심금에 낀 상사의 앙금을
잔인하게 긁어대는
그 능구렁이 사촌쯤 되는
오늘도 미인을 기다린다
바람 부는 언덕배기에서 온종일 서서
잃어버린 하얀 꿈을 잡으려
펄펄 뛰어다니는
지겹게 나를 닮은 미련한 그 사람을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미인은 누구일까. 때와 사람마다 다르지만 우리는 수많은 미인을 떠올린다. 이집트에서는 클레오파트라 중국에서는 서시, 양귀비, 왕소군, 초선 등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미인은 많다. 역사의 한 장을 그려낸 그녀들은 어떠한 미인이었을까. 클레오파트라는 이목구비가 단정한 것보다는 요염하고 정치적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양귀비는 당 현종의 환심을 얻고 온갖 수단을 다하여 황제의 눈을 가려 다른 여자를 막았으며, 초선과 왕소군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희생한 전설의 여인들이다. 우리나라도 많은 미인의 이야기가 전하지만 서양 미인들과 다르지 않다. 이를 보면 미인은 역사 속의 전설일 뿐이다. 미인은 용모가 아름다운 여자를 말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기준은 없다. 시대와 장소, 지배자의 여건에 따라 달라 어떤 기준을 세울 수가 없다. 과거나 현재 상황에 맞는 인물 선호도에 맞으면 그게 미인이다. 한기홍 시인의 미인은 또 다르다. 이목구비가 어떻게 생겼든 사랑의 감정이 크다면 그게 미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주는 사람은 어머니로 최고의 미인은 당연히 어머니다. 하나 더 있다. 친구다. 능글맞으며 심금의 상사를 잔인하게 긁어대는 이성 친구, 사랑하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고 하얀 꿈을 잡으려는 몸짓만 거듭하는 그 친구는 내 가슴에 깊이 품었으니 미인이다. 그래서 날마다 그 추억을 안고 미인을 기다린다. 떠나버린 그 여자를…
적멸(寂滅)
-한연순
붉은 사과 한 알
누군가의 혀에서 달콤하게 사라진다
오래된 오동나무 한 그루
누군가의 체온에서 오동꽃 의자로 죽는다
붉은 황홀 사과의 맛
낡은 황홀 의자의 품
어제 벗의 어머니가 세상에서 무너졌다
다시 한 번 하늘의 어머니가 심장에서
까맣게 무너졌다
주르륵주르륵 기도문을 외우며
대웅전 처마가 눈물을 흘린다
우리를 세상에 내어 준 어머니가
푸른 잎사귀 빗방울로
뒤돌아보지 않고 떠내려가신다
적멸은 반 열반이다. 열반은 불을 입으로 불어 불을 끄는 것을 말하는데 타오르는 번뇌의 불을 없애서 깨달음의 지혜를 완성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표다. 인간이 망집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결국 자아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나를 중심으로 이뤄지며 모든 것은 나의 것이라는 욕구를 가진다면 삶은 괴롭다. 그러한 욕구를 뿌리치고 삶의 경지에 오르려면 진리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수행에 전념하여 나보다 남을 위한 삶을 살아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불교에서는 세속적인 평범한 생활로는 참다운 열반에 도달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렇지만 누구나 경지에 오르지 못하며 가까이 가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삶은 힘들고 어렵다. 적멸은 그런 번뇌의 세상을 완전히 벗어난 높은 경지를 말한다. 한마디로 죽음에 들어야 가능한 일이다. 부처도 세상을 주유하며 깨우침을 얻으려 했으나 가르치며 돌아다닌 끝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나 죽음은 깨달음의 위에 있다. 적멸에 들기 전 숨 한번 쉬는 시간에 얻어야 진정한 적멸이다. 한연순 시인은 친구 어머니의 적멸에서 진정한 삶의 이치를 깨달았다. 사과 한 알의 목표와 오동나무 한 그루의 목표를 세우고 삶과 소멸의 과정을 그렸으며 어머니의 위대한 삶이 빗방울로 사라지는 장면에서 처마 밑의 진실을 보았다. 사람의 삶은 일정한 시간이면 마친다. 기뻐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지만 맞이했을 때는 슬프다. 자신이 믿는 종교가 무엇이든 삶과 죽음의 진실은 같고 누구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으며 시인이 평소에 품은 삶의 철학을 적멸로 통해 보여준다.
우물 놀이
-황인선 作
목을 꺾고 우물 안에 소리쳐 본다
까맣게 올라오는 두려움
깊고 깊음 속에 파란 하늘이 일렁이고
거기에 떠 있는 얼굴 하나
첨벙
심통 난 두레박질로 헝클이기도 하지만
찌그러져 일렁일 뿐
이내 그림판 맞추듯 되살아나는 얼굴
어쩌다 비라도 맞으면
수천 개 바늘에 찔리는 아픔도 있지만
간혹 별 하나 떨어져 박힐 때는
춤추는 풍선인형이다
날파람에 조릿대 휘청거리는 날이면
나팔꽃같이 목을 꺾고
일기예보 보듯 우물을 들여다본다
우물에 관한 시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으나 이 작품이 최고의 표현력과 서정성을 지녔다고 단언한다. 우물은 생명이다. 많은 물이 있으나 식수로 사용되는 물은 적은 양으로 정성을 다하여 살피지 않는다면 오염되어 먹지를 못한다. 농어촌은 물론이고 도시에 수도시설이 되기 전에는 모두 우물물을 마시며 살았으므로 우물에 관한 추억은 많을 수밖에 없으나 이처럼 세밀하게 묘사하여 심금을 울리는 작품은 많지 않을 것이다. 깊이를 떠나 우물에 빠진 하늘은 가장 높다. 땅속인지 하늘 밑인지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투명하게 비친 우물 속 하늘은 그야말로 선경이다. 두레박을 넣어 물을 길어 올리기 전에 얼굴이 먼저 비치고 그 얼굴은 평생을 그리워한 대상이다. 그 얼굴에 자기 모습이 일렁이면 쇠붙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도 매료되어 아무 말도 못 하고 한참이나 생각에 잠길 것이다. 황인선 시인은 여기에 더하여 비 내리는 풍경을 그려 넣어 시의 깊이를 높인다. 수천 개의 바늘에 찔리듯 튕겨 오르는 물방울은 삶의 아픔이다. 그 아픔을 견디며 삶을 이어온 자신은 이미 선경에 들었다. 밤에는 별들이 떨어져 박히고 그것은 상처를 치유하는 풍선이 된다. 우물가에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 조릿대가 흔들리면 기다림에지친 나팔꽃이 되어 다시 우물을 들여다보는 시인은 하늘보다 깊은 심성을 가졌다. 우물의 추억을 살려 우물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삶을 비춰보는 거울로 우리를 어떻게 비춰주는가를 아름답게 그려낸 작품이다.
오래 된 독서
-정하선
가장 쉽다고 읽었는데
가장 난해한 독서가
여자를 읽는 법이었구나
어머니는 고전 중의 고전
아내는 교과서 중의 교과서
애인은 베스트셀러 중의 베스트셀러
겉장을 덮은 지 이미 오래인데
머리에 갑자기 떠올라
정독을 못한 내용들이, 이제야
상념은 고요히 흐르지 못하고
여울져 소를 만들고
건너기가 불편하구나
마음이 뒤뚱거려 오늘 하루를
심신을 수양하는 방법은 많다. 산속에 들어가 몸을 단련시키고 마음의 안정을 얻어 청량하고 그윽한 상태로 만들기도 하고, 학교에 들어가 선생에게 배움을 얻어 삶의 방법을 체득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많은 방법이 있으나 개인의 환경에 맞춰 공부한다. 그러나 무슨 방법을 쓰든 기본적인 교육이 갖춰져야 한다. 말과 글자를 읽히는 게 우선이고 기본적인 삶을 체득해야 가능하다. 그러나 가장 손쉽고 효과가 높은 방법은 독서다. 남이 체험한 기록이나 새로운 학설, 상상으로 엮어진 삶의 세계를 자신이 겪지 않고도 습득하는 방법은 독서가 최고다. 그러나 쉽지 않다. 자세가 지속되면 몸이 아프고 너무 많은 독서에 머리가 어지럽기도 하다. 그래서 대부분은 읽기는 하지만 잊어버리기 마련이다. 정하선 시인은 그런 독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체험의 독서를 말한다. 꼭 책을 통하지 않고도 몸에 읽히는 독서는 체험이며 그런 독서가 가장 습득하기가 좋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 많은 세월을 보내고도 익숙하지 않은 독서가 있다. 여자의 마음 읽기다. 시인은 위트가 넘치지만 가장 진실한 체험을 통하여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정신 상태를 설명한다. 남자는 삶의 동반자로서 여자가 필요하다. 여자가 남자를 필요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이다. 그래서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헌신의 사랑이라 깊이를 모르며 아내는 동반자이지만 내적인 불안 요인과 현실의 비타협으로서 알 수 없다. 애인은 추억의 한쪽을 차지한 존재로 미움의 그래픽이다. 체험의 독서 중에 여자 읽기를 못하는 건 시인뿐이 아니다. 전 남자들이 마찬가지가. 그러나 이런 시를 쓰는 시인은 오직 정하선 시인뿐으로 삶을 얼마나 보람되게 가꿨는지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