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재단 블로그 입니다
공혜경 시인 시집 발간 축시 낭송 모임을 시작으로 다시 모였습니다
면면이 모두 다 시의 멋과 맛을 넓이 펴시는 운문의 전도사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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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종점
권 혁 수
음식은 입으로 먹는 것이지만 눈이나 코로도 먹는다고 한다. 나는 거기에다 추억(追憶)으로 먹는 것을 하나 더 포함하고 싶다.
문뜩 누군가 생각나는 날, 그 누군가와의 사연을 생각하며, 그날의 맛을 음미하는 추억의 음식이랄까.
그런 음식은 대개 고향에 있다. 하여 추석에 고향을 찾는 귀성 길은 어쩌면 내 안에 잠재해 있는 추억의 맛을 찾아가는 정기적 단체여행이 아닐까 싶다.
사정상 고향에 가지는 못해도 나 역시 가을이 되면 어린 시절의 꿈을 꾸거나 회상에 젖곤 한다. 회상 가운데는 즐거웠던 일뿐 아니라 쑥스럽고 창피했던 기억까지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에게 ‘밥이 질다’ 거니, ‘왜 우리 밥상은 매일 초원이냐’ 거니 밥투정에 반찬 투정까지 심술부리던 철없던 시절도 그립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먹기 싫어하던 밥이나 반찬을 이제 와서 다시 열심히 찾아 먹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보일까?
올 추석에는 아내가 시장을 보러나가다 그만 아파트 계단에서 다리를 다쳐 송편을 빚지 못했다. 어머니가 그러셨듯이 아내도 매년 방앗간에 가서 떡쌀을 빻고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송편을 빚곤 했는데 올핸 그러질 못했다. 대신 동서가 택배로 떡 전문점에 주문해서 모시송편을 보내왔다. 나름 맛이 있었지만 역시 내 손으로 빚어야 제 맛인데 아쉬웠다. 더 아쉬운 것은 콩 송편을 빚지 못한 것이었다. 어릴 때는 깨 송편을 좋아해서 콩 송편은 거의 어머니 차지였는데 웬일인지 이제는 콩 쪽으로 손이 먼저 간다. 콩이 더 맛있다는 걸 이제야 안 것일까, 아니면 어머니에 대한 죄스러움과 그리움 때문일까. 모르겠다. 하여간 어머니를 추모하며 졸렬한 단상(斷想) 한 줄 그려본다.
<종점>
낙엽의 가을 여행은 종점이 없다
흩어지고 모이고 다시
걸어도 걸어도 닿을 수 없는
미운 사람도 그리운 마을, 그 집
정화수(井華水) 떠다 장독대에 올려놓고
솔향기 은근한 달빛송편 빚어놓고
바람 바람 행길 건너 건너
가로등 아래 서 계시는 어머니가
종점이다
어머니가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 가운데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이하던 사람이 있었다. 바로 큰매형님이다. 지난해 작고하신 큰매형님은 생전에 계절이 바뀔 때면 으레 어머니를 모시고 막국수를 먹으러 가곤 했었다. 젊은 시절엔 막국수를 곱빼기에 국수사리를 하나 더 얹어 드셨는데 여든이 넘어서면서는 소화가 힘들다며 보통을 시켜 드셨다. 그마저도 가위로 반을 잘라 반 그릇만 드셨는데 그래도 계절이 바뀔 때면 막국수 맛 순례를 거르지 않으셨다.
하지만 큰매형님은 보리밥은 절대 드시지 않았다. 가난한 시절에 질리도록 먹어서 보기만 해도 목구멍에 신물이 올라온다고 손사래를 치셨다. 추억도 다 같은 추억이 아닌가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추억이란 길들여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인 K네는 집에서 김치를 <전라도식 김치>와 <서울식 김치> 두 가지로 만들어 먹는다고 한다. 아버지는 서울 토박이고 어머니는 전라도 어느 바닷가 마을이 고향인데 아버지가 젓갈이 많이 들어가는 전라도식 김치를 싫어하고 오로지 슴슴하게 담근 서울식 김치만 고집해서 그렇다고 한다. 김치 종류에 서울식 김치가 별도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든 그 덕에 K는 어려서부터 두 지역의 별미김치를 다 맛있게 먹게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돌아가신 어머니가 해주셨던 호박범벅 맛을 지금도 향기롭게 기억하고 있다. 하여 지난해 가을에는 텃밭에서 딴 늙은 호박으로 범벅을 만들어먹자고 아내에게 제안을 했다. 하지만 아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내는 범벅 대신 호박죽을 쑤었다. 호박죽을 먹으며 <아, 장모님께서 전수해준 죽 맛이 이 맛인가 보다!> 하고 음미하며 먹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음식은 우리에게 가장 유용하고 친근한 전통유산이 아닐까 싶다. 우리 몸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기에.
그에 걸맞은 음식 전수에 대한 스토리가 또 있다. 1983년, 미국 이민가정의 애환을 극화한 영화 <미나리>가 그것이다.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순자 역)이 미국에 이민을 가서 채소농장을 하는 아들네 가족을 찾아가 한보따리 싸가지고 간 한국 음식을 손자들에게 먹여주고 함께 농장 인근 개울가로 나가 미나리 씨앗을 심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해외동포들의 마음에다 우리의 맛을 심어주는 의미 깊은 메시지가 아니었나 싶다. 아울러 미국 자체가 해외이주민 사회다 보니 아마 그들도 깊게 공감하여 그녀에게 아카데미상을 주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서양인들 역시 우리와 정서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안톤 체홉의 소설 <나무딸기>를 보면 주인공 니꼴라이 이바늬치는 일생 동안 극도로 절약하고 돈 많은 과부와 결혼까지 하여 마침내 영지를 구입하였는데 그 영지에다 딱딱하고 시큼한 20그루의 나무딸기를 직접 심는다. 그 이유는 어린 시절에 따먹었던 그 나무딸기의 맛이 그리워서였던 것이다.
나도 J란 초등학교 때 친구와 대추를 따먹던 기억이 가을만 되면 솔솔 떠오른다. 방과 후에 그 친구네 집 대추나무에 올라가 아슬아슬 손을 뻗어가며 따먹었던 그 붉고 단단한 대추의 식감과 달콤한 맛.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대추의 맛은 이제 다시는 맛볼 수 없게 되었다. 친구는 직업상 멀리 다른 고장으로 이사를 갔고 대추나무는 동네가 아파트단지로 변모하는 바람에 베어져버린 것이다.
아쉽다. 그래도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춘천엘 한 번 다녀와야겠다. 그 대추나무는 없어졌지만 그곳에 가서 막국수도 먹고 고향을 지키고 있을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어가며 먹었던 닭갈비도 몇 대 뜯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