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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석(sbs3039)
시 처럼 살기
-벽년해로-

아직 내어줄
가슴이 있고
기댈 어깨가 있으니
우리 백년해로에
아쉬울 일 없다
부부란 서로에게 마음이 되어 주는 일로
정 나눔 하는 사이





시詩사랑하기 바빠서 늙을 틈 없네*서봉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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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마간산, 고북구(古北口) 여행기 ❶ 한 기 홍
2024-05-31
조회수 : 154

 

이글은 코로나19 독감이 아직 창궐하기 전인 2019년 여름(2019.06.06.~09)에 다녀온 여행기다. 조선시대 연암 박지원이 펴낸 열하일기 중, 북경에서 열하로 가는 여정을 그린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에 묘사된 몇 장면을 더듬어 보고자 했다. 특히 24권 산장잡기(山莊雜記)에 실린 명문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를 현장에서 느끼고자 하였으나, 허술한 계획으로 주마간산격이 되고 말았다. [필자 ]

 

 

중국여행 34일 일정에 무얼 깊이 통찰해보랴. 애시당초 큰 기대는 없었다. 더구나 장성쪽 연암의 행적을 찾아가는 일정은 하루였기에 수박 겉핥기에 다름없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선인의 체취를 맡고자 버스에 올랐다. 고북수진(古北水鎭)은 연암이 지나갔던 만리장성 관문 마을로 고북구가 정식 명칭이다.

고북구가 가까워질수록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산맥의 위용이 장난이 아니다. 어슴푸레한 석양빛에 드러나는 험준한 산악의 형세는 연암이 묘사한 광경을 일깨워 준다. 수묵 동양화를 보는 듯한 기암괴석과 준령이 웅장하게 펼쳐지고 있다. ‘西圈2호 터널을 통과하며 이정표를 힐끔 보니, 고북수진을 20Km 남겨두고 있다. 문득 피곤에 잠시 졸다가 차창을 보니, 희미한 무언가가 험준한 산악의 고갯마루로 치달아 올라가는 듯한 형상이 보였다.

! 저것은. 눈두덩을 비비며 자세히 보니, 저녁안개 속으로 그 형상이 흩어지고 있었는데, 희끗한 머리카락을 갓끈과 휘날리며 흰 장삼자락을 조여 맨 사나이. 준마를 타고 달리는 건장한 선비의 기상이 배어나오는 바로 연암의 모습이었다. 비몽사몽간의 환각일까. 그렇다. 이 산맥의 준령, 그리고 이 험난한 산길은 바로 240여년 전 연암이 지나갔던 길이다. 이제 그 연암의 족적을 따라 후학이 버스로 고도(古道)를 지나고 있다니 감회가 벅차 올랐다.

그래, 바로 차창 밖에 펼쳐지는 저 어둑한 산록의 희미한 길들이 연암이 야밤에 달렸던 길. 1890년 구한말 학자 창강 김택영이 열하일기의 명문장들을 발췌한 연암집을 발간하면서 조선 5천년 이래 최고의 명문장으로 평가한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의 현장인 것이다. 열하일기 24권 산장잡기

 

 

(山莊雜記)에 실린 짧은 수필형식의 글인데 도입부와 중반부 일부를 옮겨 본다.

 

연경(燕京)으로부터 열하에 이르는 데는 창평(昌平)으로 돌면 서북쪽으로는 거용관(居庸關)으로 나오게 되고, 밀운(密雲)을 거치면 동북으로 고북구(古北口)로 나오게 된다. 고북구로부터 장성(長城)으로 돌아 동으로 산해관(山海關)에 이르기까지는 7백 리요, 서쪽으로 거용관에 이르기는 280리로서 거용관과 산해관의 중간에 있어 장성의 험요(險要)로서는 고북구 만한 곳이 없다. (중략)

나는 무령산(霧靈山)을 돌아 배로 광형하(廣硎河)를 건너 밤중에 고북구를 빠져나가는데, 때는 밤이 이미 삼경(三更)이 되었다. 중관(重關)을 나와서 말을 장성 아래 세우고 그 높이를 헤아려 보니 10여 길이나 되었다. 필연(筆硯)을 끄집어내어 술을 부어 먹을 갈고 성을 어루만지면서 글을 쓰되,

건륭 45년 경자 87일 밤 삼경에 조선 박지원(朴趾源)이 이곳을 지나다.”

하고는, 이내 크게 웃으면서,

나는 서생(書生)으로서 머리가 희어서야 한 번 장성 밖을 나가는구나.” 했다. (중략)

한밤중에 연암이 고북구 장성을 넘는 소회를 서술한 문장으로 고문의 정수를 계승하면서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문체라 할 간결하고 응축적인 필체를 구사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조선의 장구한 고어체 문체에 일대 변혁을 준 연암을 위대한 문필가로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한국의 가장 활발한 문학 장르인 수필문학의 효시라고도 볼 수 있는 명편들이 열하일기 곳곳에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