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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년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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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별전
권 혁 수
요즘 들어 부쩍 스마트폰의 ‘연락처’ 검색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얼굴은 기억나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거나 성씨는 기억나는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렇다. 어느새 치매인가?
올 1월에 배우 윤정희씨가 치매(알츠하이머)로 운명을 달리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주연한 ‘시(詩)’란 영화를 몇 년 전에 본 기억이 있는데, 주인공 양미자(윤정희 분, 66세)가 사람들의 이름을 자주 잊어버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는 장면이 압권이다. 치매초기 증상이라는 진단을 의사로부터 설명 듣고 정색을 하며 부정하다가 창가에 피어있는 붉은 동백꽃을 바라보는 그녀의 공허한 시선(視線), 그것은 그녀의 앞날에 대한 복선이요 나의 미래에 대한 예고가 아닐까 싶다. 언젠가 나도 그녀처럼 누군가의 이름을 까맣게 잊을 런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은 다행이다. 등장인물 중에 권혁수란 배우가 단역으로 나와 정호승의 시<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낭송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만난 적이 없어 기억에 없는 배우지만 그래도 나와 같은 이름이기에 기억하게 되는 것 같다.
여하튼 그녀의 기억력 상실처럼 번번이 누군가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나의 증상이 의심스러워 지인들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모두들 웃으며
“나도 그래-” 하는 것이 아닌가. 허허... 기억상실이 이 시대의 유행인가 아니면 양미자와 같은 초기증상인데 모두가 공동으로 간과하며 지내고 있는 게 아닌지 적이 우려스럽다.
내 것이면서 내 것이 아닌 것이 이름이다. 남들이 부르기 좋게, 기억하기 좋게 부모님이 짓거나 작명소가 대행해주기도 하는데 아무리 좋은 이름이라하더라도 부르기 싫거나 기억하기 불편한 이름도 있다. 왜 그럴까? 내 비뚤어진 감성 탓일까, 아니면 어떤 운명적인 악연 때문일까? 뭔가 비밀스러운 코드가 각자의 이름 속에는 은밀히 숨겨져 있는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한때 사춘기 시절에 내 이름과 친구들 이름에 어떤 운명이 숨겨져 있을까 궁금하여 밤새워 『성명학』 책을 탐독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이름이 별로였는지 기억에 남는 게 없고 다만 <제1장>에 여자의 이름은 문자보다 <얼굴의 미색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는 대목만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남자라고 운명이 얼굴과 무관할까만 남존여비 시대의 편향적 해석이 아니었나 싶다.
이제는 아들보다 딸을 더 선호하는 시대가 되어 여자들의 이름도 심사숙고해서 짓는 경향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유니섹스 시대라 옷이나 머리 스타일처럼 이름도 성별구분이 쉽지 않게 짓거나 국제화시대라 외국인 이름이나 특정 종교의 성자 이름을 본 따 짓기도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개성시대에 발맞춰 자기 취향대로 개명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대략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많은 것 같은데, 남존여비 시대에 대한 저항이랄까, 그런 이름에서는 현대적 감각에 맞춰 품위 있게 자신의 운명을 이름을 통해 바꾸려는 의지가 강렬하게 느껴진다.
누구나 품위 있게 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동창 모임에 나가보면 으레 성공한 친구의 이름은 친근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반면, 행동거지가 불량하거나 사업을 실패한 친구의 이름은 다소 거칠게 부르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이름의 품위는 그 이름의 소유자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
이름이 사람을 만든다기보다 사람이 이름의 가치와 품격을 만든다고나 할까.
예를 들면 서양에서 흔한 이름인 잭은 나무꾼이란 의미고 스미스는 대장장이고 피터는 그리스어로 돌이란 뜻인데 ‘잭 라빈’은 시카고불스 소속 농구선수고 ‘피터 빈트’는 세계적 유명 방송 연예인이며 ‘샘 스미스’는 영국의 유명가수다. 우리나라에서도 동건이란 이름은 평범한 이름이지만 김동건 아나운서와 미남배우인 장동건이 있고 철수란 이름 역시 흔한 이름이지만 배철수라는 가수이자 유명 방송인이 있고 안철수는 의대출신의 유력 정치가가 아닌가.
나폴레옹이 <내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고 했다던가! 그렇듯이 내 스마트폰 속에도 구제불능인 사람의 이름은 하나도 없다. 다만 별도의 내 의식 속 <이름별전>에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그 이름들이 기피 인물로 명확히 등재돼 있어 참으로 기묘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 이름들은 애초에 이름사전에 올리지 않았거나 올렸다가 지운 것들이 대부분인데, 검색하지 않아도 마치 PC의 바이러스나 조간신문의 흉악한 사건기사처럼 뇌리에 시도 때도 없이 툭 툭 튀어나와 나를 곤혹스럽게 한다. 늘 함께 하고 싶은 친구들 이름보다도 더 자주 자극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K 00 돈 떼어 먹은 사기꾼
L xx 영리한 배신자
C ^^ 한때 다정했던 이중인격자
H oo 이기적인 인간
M !! 부조를 받기만 하고 한 번도 연락조차하지 않는 놈
단 1초도 함께 하고 싶지 않은 이름들이다. 이밖에 누구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이름사전에 등재는 돼있으나 수년간 단 한 번도 검색되지 않는 그래도 언젠가 전화를 걸어주기를 소망하는 섭섭한 이름도 꽤나 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나는 그런 이름의 존재를 모두 품위 있게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정리하기로 했다. 그들이야 말로 내 인생의 밑바닥과 그늘진 이면을 살필 수 있게 나를 일깨워준 소중한 존재들이란 반성이 들어서였다. 별전에는 그들뿐만 아니라 이미 작고한 친구들 이름도 다수 들어있는데 그 이름들 역시 내게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 필연적 존재들인 것이다.
<진공묘유(眞空妙有)>의 한 모서리랄까! 실로 내 이름별전 속 그들 모두는 내 무명(無明)번뇌의 삶을 두루 살피게 하는 명상항해의 등대불이 돼주는 존재들인 것이다. 하여 오늘 하루는 <분별함으로써 분별함이 없게> 어떤 녀석이 나의 등대불이 돼주려나!
시인 김춘수는 <그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 나는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된다>고 노래했다던가!
과연 나는 그 누군가에게 어떤 이름, 어떤 빛깔의 꽃이 될 것인가? 그 누군가의 이름별전에 나는 뭐라고 등재돼 있을까?
오늘도 나는 별전 속에서 이름 몇 개를 골라본다. 그리고 안개가 그윽한 마지막 봄날 아침, 내 마음의 꽃밭에 정성스레 심어놓고 거리로 나선다.
문득 어느 골목에선가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