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문화재단 블로그 입니다
-벽년해로-
아직 내어줄
가슴이 있고
기댈 어깨가 있으니
우리 백년해로에
아쉬울 일 없다
부부란 서로에게 마음이 되어 주는 일로
정 나눔 하는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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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북한산, 도봉산, 불암산, 아차산.......
휴일이면 아내와 함께 오르던 산이다. 신혼여행 때 한라산에 오른 것 말고는 서울에서
먼 산은 거의 올라본 기억이 없다. 아내가 차멀미로 장거리 여행을 극도로 기피하는 것 때문이었는데
혹시 새 아파트를 장만하기 위해 여행비용을 아끼느라 그런 것은 아니었을까?
산행하려면 누구나 그렇듯이 준비할 게 많다. 물통과 간식, 김밥 그리고 스틱 등.
그 가운데 나는 스틱만은 꼭 챙긴다. 그것은 언젠가 휴일에 아내와 북한산 비봉에
올라갔을 때 하산 길에 무릎이 시큰거려 소나무삭정이를 주워서 짚고 내려왔던 게
결정적 계기였다.
그리고 또 언젠가 우연히 서울둘레길에서 만난 어느 정형외과의사의 말을 듣고서
스틱의 필요성에 대해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찾는 환자 상당수가 정
년퇴직자들인데 퇴행성 질환이 많기도 하지만 퇴직직후 백두대간을 타거나 에베레
스트 등 고산 트래킹을 다녀와서 무릎 통증을 심히 호소한다는 것이었다. 주 원인
은 스틱 없이 장거리 산행을 감행했기 때문이란다.
그런가 하면 함께 근무했던 동료직원 가운데 N선생의 경우도 그랬다. 그는 한때 국
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근무를 했었는데 담당업무가 산을 오르내리며 등산로에 설
치돼 있는 안전시설을 점검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하여 처음엔 경치가 수려한 산을
매일 오르내린다는 게 너무나 즐거워 그야말로 신바람 나게 업무를 수행했다고 한
다. 하지만 몇 해 못가 그만 무릎이 고장 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그 일을 그만두
게 되었다는데, 그 역시 스틱 없이 산행업무를 수행했다고 솔직히 실토했다.
지팡이는 일반적으로 등산용과 신체 보조용으로 구분한다.
우리는 등산용 지팡이를 보통 스틱(stick)이라고 지칭하지만 산악등반용은 피켈
(pickel)이라하고 구미에서는 알펜스톡(alpenstock)이라 한다.
워킹 스틱, 케인(cane)이 일반적인 용어인데 맹인은 흰지팡이(white cane), 마술지
팡이는 완드(wand), 가톨릭 주교의 지팡이는 크로시어(crosier)라 하는 등 용도에
따라 명칭도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지팡이’ 하면 전적으로 노인의 소유물로 알려져 있다. 청려장 같은
효도지팡이는 명아주로 만들고 벼락 맞은 감태나무(연수목) 지팡이가 있는가하면 딱
총나무, 은행나무, 대나무, 카본으로 만드는 등 재질에 따라 지팡이의 이름이 결정
된다.
상징적인 지팡이로는 큰스님의 주장자가 있는데 주장자는 큰스님의 불편한 몸을 지
탱해 주는 건강보조도구라기 보다 불교의 교리 특히 선(禪)의 요체를 대중에게 전달
하는 방편의 도구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지팡이 가운데 백미는 민중의 지팡이
‘경찰’이 아닐까 싶다.
(나는 누군가의 지팡이인가, 아니 잠깐이라도 지팡이인 적이 있었는가?)
최근에는 매주 아내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 둘레길이나 천마공원 오솔길을 걷고
있다. 집에서 가깝고 서울 둘레길과 연결된 비교적 평탄한 코스라 스틱 없이 홀가
분하게 집을 나선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아내가 어디서 들었는지 종아리 근육을
질기고 단단하게 만들려면 가끔 가파른 언덕을 오르는 것이 좋다며 갑자기 노선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하여 뜻하지 않게 그런 날은 가파른 산길을 오르게 되었는데
역시 하산할 때 무릎에 심상치 않은 통증의 조짐이 느껴졌다. 하여 부득이 등산로
주변에 널려있는 삭정이를 골라 짚고 내려올 수밖에 없어 이따금 삭정이를 고르게
되는데 대개는 앞서가는 아내를 따라가느라 급한 마음에 아무거나 대충 찾아서 짚
는다. 하지만 어느 날은 운 좋게 가볍고 탄력이 좋은 놈을 골라 짚는 날도 있다. 그
런 날은 걷기가 상쾌하고 왠지 기분이 좋았다. 마치 <선녀와 나무꾼> 전설의 나무
꾼이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드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또 구청에서 산림육성 사업을 하느라 가지치기를 해서 쌓아놓은
잡목더미 속에서 모양 좋은 떡갈나무 삭정이를 골라잡았다. 줄기가 가늘고 낭창낭
창한 게 여간 산행하는 맛이 나는 게 아니었다. 하여 그것을 짚고 산행을 마치고
나서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집으로 가져가려하자 아내가 극구 반대를 했다. 집에
등산용 스틱이 엄연히 두 개나 있는데 왜 구질구질하게 쓰레기를 주워 들이려 하느
냐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고집스럽게 집으로 가져와 톱질을 하고 손칼로 잘 다듬어서 라커 칠을
해보았다. 라커 칠을 해보니 삭정이가 기린의 다리처럼 미끈하게 변신을 하는 게
아닌가. 대견하고 기꺼웠다. 버려진 쓸모없는 떡갈나무 삭정이가 등산용 스틱으로
재탄생하다니! 게다가 나 자신 또한 뜻밖에 ‘스틱 장인’이 된 것 같은 성취감마저
드는 것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몇 개 더 만들어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싶기까지 했
다.
하지만 떡갈나무 삭정이는 나와 잠깐 만나 함께 산행을 하게 된 인연일 뿐, 언젠가
나와의 인연이 끝나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그 무엇이 될 것이다.
다시 땅으로 돌아가 산새의 둥지나 짐승의 보금자리의 버팀목이 되거나 또 경우에
따라서는 푹 썩어 꽃나무의 밑거름이 되어 어느 봄날, 화사한 들꽃으로 피어나기도
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아파트출입문 앞에 놓여 있는 떡갈나무 지팡이를 만져본다.
휴일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