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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마지막 불꽃까지 다 태우고 싶어"...희곡작가 김영무
인터뷰: KAWF Interview #2
"마지막 불꽃까지 다 태우고 싶어!"
희곡작가 김영무
극작가 김영무는 1943년 경북 칠곡군 북삼면에서 태어났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에 입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한 그는 한국문인협회 희곡분과 회장을 2회 연임했으며, 한국희곡문학상(1985), 행원문학상(2002), 대한민국 문학상(2003), 한국예총문화상(2010), PAF예술공헌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20여 년간 KBS, MBC, SBS, EBS 등에서 방송작가로도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2005년에는 BTN(불교방송)에서 MC로 '김영무가 만나는 문화 문화인'이란 대담 프로그램을 7개월간 진행하였다. 다른 한편 그가 베스트셀러를 3번이나 펴낸 단행본 출판사의 대표이기도 했었다.
그 동안 그가 저술한 20여 편의 저서 중에서 장막희곡집으로 『달은 달(1999)』,『퇴계 선생 상소문(2001)』이 있고, 아동극 선집으로 『보물찾기』가 있는가 하면 『동양극장의 연극인들』,『드라마의 본질적 이해』,『한국동인극단 50년사』,『서양연극의 총체적 개념정리』와 같은 연극이론 서적들이 있다. 아울러 그는『반야심경으로 보는 불교 사상』,『동양의 20가지 가치관』,『21세기 군자 만나기』와 같은 동양사상 교양서를 펴내기도 했다. 정통희곡은 물론 오페라와 무용극 및 악극대본까지 줄잡아 40여 편의 작품을 공연으로 발표하기도 했던 그의 작품 중에서 『구름가고 푸른 하늘(1985)』,『하늘 천 따지(1992)』,『탈속(1993)』,『소나무집 여인(2000)』,『황진이(무용극, 2002)』,『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악극, 2004)』,『아, 고구려-광개토 호태왕(오페라, 2005)』,『포옹 그리고 50년(2010)』,『시집가는 날(오페라, 2012)』 등 작품성과 흥행 면에서 두루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었다.
올해 나이 72세가 되어 이른바 고희를 넘긴 그는 저간에 맛보기처럼 연극연출, TV MC, 연극배우에 일종의 생활방편으로 정력적인 방송작가 활동도 겸해 왔지만, 정작 본인이 고집하는 직함은 역시 "희곡작가"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런 그가 2011년 가을에 돌연 간암판정을 받았고, 현재까지 색전 시술을 다섯 차례나 받으며 투병생활을 해왔단다. 그러나 그의 일상생활에 별다른 변화는 오지 않은 모양이다. 지난 3~4년 동안에도 그는 무려 10여 편 이상의 작품을 집필했을 뿐만 아니라, 포항 시립극단이 그의 신작 희곡『창의장군 김현룡(2012)』을 무대에 올렸고, 뉴서울 오페라단이 『시집가는 날』을 무려 다섯 차례나 중국에서 공연하게 되었다. 베이징, 상하이, 동관시, 항저우, 시안에서 그의 오페라가 공연될 때마다 김영무 작가는 일일이 동행해 모니터를 직접 수행하기도 했다.
덧붙여 그는 내년에 무대에 오를 예정인 희곡 『노자 일기』,『독도 수비대』와 오페라『고타마 싯다르다』 등의 작품에 작가로서의 기대를 걸고 있다면서 "마지막 불꽃까지 다 태우고 가야 하지 않겠냐"며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기기도 했다. 그에게 집필활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에디터|김세영(prisca@kawf.kr)
희곡작가 김영무_ⓒ한국예술인복지재단
Q. 희곡작품을 정말 많이 쓰셨다. 거의 80여 편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2011년 10월에 간암판정을 받았고, 그 이전에는 '생과 사'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을 별로 해본 적도 없는데...사실 그럴 틈도 없었고... 간암판정을 받고 보니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죽음'이란 문제를 생각하게 되더군요. 친구나 지인들을 만나게 되면 자꾸 얘기가 그쪽으로 흘러가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순간부터 사람들이 종교적인 인간이 되는 것 같더군요.(웃음)
그랬는데 희한하게도 그때부터 일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전생에 내가 게으름을 피웠거나...현생에 내가 숙제로 부여받은 일들이겠거니' 하면서 청탁받은 원고들은 무조건 접수하고 집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듯 혹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불과 3~4년 동안에 10여 편이 넘는 작품들을 집필하게 된 모양입니다.
Q. 많은 작품 가운데 특별히 애착이 가거나 아쉬운 작품이 있으시다면?
『구름 가고 푸른 하늘』,『탈속』 등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고, 오페라 대본『시집가는 날』도 애정이 가는 작품인데, 뭉뚱그리자면 모든 작품에 아쉬움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덧붙여 일부 젊은 작가들 중에는 '히트작'만을 꿈꾸면서 작품 집필과 발표를 잘 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한 태도는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도공들이 수백 수천 번 구워 낸 도자기 중에서 한두 점의 명품을 건지는 것처럼 작가들도 일단 글을 많이 써봐야 명작이든 졸작이든 나오지 않겠습니까.
Q. 희곡작가로 첫 발을 들인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제가 희곡 작가로 데뷔하게 된 동기는 다소 특별한 경우라고 보는데...제가 생각해 봐도 '좀 엉뚱한 인간'이란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군요. 1969년에 대구교대를 졸업하면서, 가볍게 써 본 작품 『쫓겨난 사람들』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작 없는 수석가작으로 입선되면서 너무나 급작스럽게 그리고 쉽사리 문단에 데뷔하게 된 셈이거든요. 그전까지 습작도 별로 해보지 않았고, 기껏해야 단막극 한편 정도 써본 것이 전부였는데...아, 같은 해 국방부에서 공모한 장막극에도 『탄원서』란 작품을 투고했더니 당선되어 생전 처음 원고료로 몫돈을 만져보기도 했었죠. 물론 학창시절부터 책읽기를 좋아하기는 했습니다. 고교 재학시절에 국내 시인부터 릴케, 바이런 등이 쓴 명시들도 거의 다 읽어보았고, 국내외 장편소설 300여 권도 읽었죠. 실존주의 철학서들도 더러 읽었으니까요. 물론 라디오 드라마도 청취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라마의 매력에 빠져 들기도 했습니다.
Q. 현실적으로 연극이나 오페라 희곡 10편 쓰는 것보다 대박 영화 시나리오 1편이나 TV극의 집필이 소득 면에서 더 좋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드라마를 쓰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하필이면 왜 이렇게 힘든 순수예술 쪽의 일을 하느냐'하는 식으 질문인 것 같은데...혹시 '기차통학'이라고 들어봤는지 모르겠군요. 내가 어렸을 적에 중고등학교에 가려면 집에서 기차역까지 4km를 매일 새벽에 걸어서 기차를 타고 가야만 했습니다. 4km의 산길을 내려오는 그때가 바로 동틀 무렵이었고요. 동틀 무렵의 그 새벽 노을의 아름다운 장관을 보노라면, 소위 '엑스터시(환각) 효과'를 경험하면서 황홀경에 빠져들게 되곤 했었습니다. 말 그대로 현실감각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1933년에 취재 여행 차 아프리카 케냐에 간적이 있었는데, 그날 밤에 달이 떠오르는 광경을 보며 모처럼 옛날의 그 황홀경을 되새김하기도 했었죠. 어쨌거나 내가 사남매 중 셋째인데, 아버지가 유독 나를 예뻐해 주셨답니다. 무엇보다 제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으니까, 아버지 입장에서 그게 그렇게 좋으셨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렇게 되어 제가 스토리를 잘 만드는 연습을 어렸을 때부터 배우게 된 셈이었죠.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쫓겨난 사람들>도 사실은 반공포로 수용소에서 귀환하셨던 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였죠.
그리고 내 방송이나 영화 등 상업적인 대중예술은 매체적 특성이나 제약 때문에 작가의식 표현에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연극을 위한 희곡의 영역에서는 소재나 주제 등의 설정에 하등의 제약도 없거니와, 그 어떤 철학적 가치관도 가미될 수가 있어, 그야말로 자유롭게 작가정신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작가적 개성이 기본 토대라 볼 수 있겠지만요.
이를테면 TV극도 집필하고 방송해 본 경험이 있고, 영화 시나리오도 집필하고 촬영에 임한 경우가 있어 하는 말인데, 제 경우에는 희곡을 집필하면서도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면 큰 보람을 느끼는데, 상업드라마의 경우에는 그런 만족감을 별로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농담이 되겠는데...제가 희곡을 쓰느라고 끙끙 거리면 아내의 반응이 시큰둥하다가도, 방송극을 쓰면 커피도 타다 주는 등 태도와 대우가 달라져도 제 생리는 변할 줄을 모르더군요. 희곡의 경우에는 작품이 탈고되고 무대화 과정 속에서도 연출가와 호흡 맞추기나 배우 캐스팅 또는 무대미술 등 신경써야 할 것들이 무지기수인데도, 자청하듯 그런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니...팔자이거나 운명이란 생각도 뿌리칠 수가 없고요.(웃음)
Q.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곡에 대한 매력이 크다는 말인가?
특정한 공간 속에서 관객과 직접 함께 호흡하면서 공감을 창충해 가는 연극예술과 스크린을 통한 TV극이나 영화는 분명 그 체험적 효과가 다릅니다. 영국의 연극학자 마아린 에슬린은 '극장을 세속적인 성당이라 한다면, 성당과 사원들은 종교적인 극장'이라 말한 바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극장은 물론 연극공연장인 거구요.
희곡작가 김영무_ⓒ한국예술인복지재단
Q. 올해 집필하신 작품에 대해 소개해 주신다면?
금년에는 희고조의 산문집 <인연타령 91>이란 책을 한 권 집필해서 현재 출판사에서 편집 중에 있습니다. 그간 제가 만난 사람들 약 90여 명에 대한 인연들을 솔직한 필치로 서술한 내용이에요. 그리고 조선조 화가 '김명국'의 일대기를 소재로 삼아 장막 희곡 1편을 썼습니다. 결국 대작이 되고 말았고요. 조선 인조 때 활약했던 김명국은 '신필(神筆)'로 알려진 화가인데,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 배워서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타고난 천재화가라는 얘기예요. 따라서 유홍준 교수는 김명국이 '신필 제1호'이고 <취화선>이란 영화로 잘 알려진 오원 장승업이 '신필 제2호'라고 얘기한 바도 있답니다. 아, 제가 김명국의 일대기를 작품화 하게 된 계기나 동기 등은 일단 비밀에 붙여 두겠습니다.(웃음)
Q. 선생님은 '동양철학'에 조예가 싶으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양의 현대 극작가들이 동양의 미학 내지 가치관에서 새로운 무대미학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접하게 되면서...그렇다면 그들이 접한 동양의 미학이나 가치관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품고 탐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게 벌써 30여 년 전이 되는군요. 그래서 『반야심경으로 보는 불교사상』,『동양의 20가지 가치관』,『21세기 군자 만나기』 등의 저서를 집필했던 겁니다. 후학들이 참고하란 의미에서요. 물론 그러한 공부가 제 작품의 집필에 직접 많은 도움을 주기로 했고요. 이를테면 제가 그동안 공부를 하면서 골치를 가장 많이 썩힌 부분이 '산수화의 원리' 찾기였는데 아마 2년 정도가 걸렸을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산수화의 원리는 장자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단 말씀이예요. 그리고 공자의 미학은 시와 음악에 기반을 두고 있고....그러니까 2012년에 거창 국제 공연예술제 집행부에 넘긴 작품이 가야금의 창안자 우륵의 일대기를 그린 『가야의 노래』인데, 그 작품에서는 공자의 미학과 장자 미학의 부딪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명국의 일대기에서는 당연히 산수화의 원리가 전개되었고요. 아, 서양의 사실주의 풍경화와 동양의 산수화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동양의 산수화는 그야말로 철학화에 속하거든요.
Q. 선생님께서는 올해 '창작준비금 지원'을 받으셨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선생님의 왕성한 창작 활동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원 액수의 크고 작음 등을 문제 삼을 수는 없겠죠. 내가 좋아 선택한 예술이기에 현실적인 어려움 등은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왔으니...이번의 이런 혜택은 덤으로 생각해야겠죠. '순수예술 행위와 보상 문제'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과제 같은 것인데, 사실 예술가가 보상 등에 신경을 쓰다보면 정작 작품 활동과 멀어지는 경우가 허다한 거죠.
그렇다 하더라도 예술인 복지를 위한 재단이 출범했으니,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좀 더 잘 운영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예술인들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예산도 많이 확보되었으면 좋겠고요. 가만히 보니 요즘 복지재단이 여러 모로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Q. 예술활동증명은 정부가 인정하는 '예술인의 실태'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다.
예술활동증명의 기준이 높고 낮음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모든 이에게 두루 만족을 줄 수 있는 제도는 결코 없을 거예요. 다만 한 가지 프로와 아마추어에 대한 구분만은 명백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단호할 떄에는 단호한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을 거고요. 쉽게 말하자면, 사이비 예술인들의 입을 막느라 진정한 예술인을 외면하게 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겠죠. 국민의 혈세를 낭비해선 안될 일이잖아요?!
희곡작가 김영무_ⓒ한국예술인복지재단
Q. 후배작가들 혹은 청년예술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작가로서 늘 '문제의식'을 가지라는 말을 하고 싶군요. 문제의식이 있어야만 자기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배우를 예로 들어 보자면, 공연을 앞두고 캐스팅을 할 때가 되고 보면 배우가 눈에 잘 띄질 않아요. 수 천, 수 만 명의 배우들과 지망생이 있다는 숫자는 알만한데...역할에 맞는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단 말이예요. 결국 자기 색깔을 지닌 배우가 별로 없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요즘 한창 유행하는 팝그룹이나 걸그룹 등을 봐도 벌써 엇비슷해져서 누가 누구인지 분간이 어려워지고 말았단 말이예요.
Q. 마지막으로 꼭 쓰고 싶은 작품이 있으신지 궁금하다.
현재로서 딱히 쓰고 싶은 작품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그간 80여 편의 작품을 집필했고 약 40여 편이 무대에 올려졌으니...속된 말로 하고픈 말을 어지간히 다한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작년에 탈고한 오페라 작품『고타마 싯다르타』와 희곡『독도수비대』,『노자일기』,『장씨 일가』 등이 내년에 공연될 예정이어서 신경이 곤두서 있는 형국이고요. 그런데 악극 한 편을에 대한 집필이 협의 중이어서 계약이 된다면 그건 써내야 하겠죠. 미리 귀띔해 드리자면, 경북 경산시 출신 대중가요 가수 방운아의 일대기가 될 거예요. 또 기회가 주어진다면, '예술의 힘'이란 주제로 책을 한 권 더 쓰고 싶기도 하고요. 우리 국민들의 문화의식 제고를 염두에 두고서요.
희곡작가 김영무_ⓒ한국예술인복지재단
어차피 저는 후회없는 삶을 살았고 지금도 원망의 대상이 없는 마음으로 살고 있답니다. 다만 지금까지 묵묵히 수많은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제 곁을 지켜 준 아내와 별 탈 없이 잘 자라준 자식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