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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석(sbs3039)
시 처럼 살기
-벽년해로-

아직 내어줄
가슴이 있고
기댈 어깨가 있으니
우리 백년해로에
아쉬울 일 없다
부부란 서로에게 마음이 되어 주는 일로
정 나눔 하는 사이





시詩사랑하기 바빠서 늙을 틈 없네*서봉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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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육필의 향기
2024-10-11
조회수 : 53

육필(肉筆)의 향기

 

 

 

신문기사에서 눈길을 끄는 글이 있었다. 내용은 요즘 화제가 되고있는 챗GPT의 등장으로 그나마 명맥을 잇고 있는 육필시대의 종언을 걱정하는 오피니언(opinion)의 글이다. 모든 문서작업을 로봇이 알아서 척척 해주니, 고역스럽고 시간이 걸리는 수작업 글쓰기를 누가 하겠냐는 탄식이다. 아마도 미래는 직접 쓰는 손글씨는 글씨를 연구하거나 서예를 즐기는 소수층의 육필문화로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섞인 글이다.

그러나 문학인들의 우려는 그리 크지 않다. 창작과정에서 육필로 초고를 작성하는 문인들에게 붓과 펜의 손맛을 거쳐 완성되는 작품 상재(上梓)의 희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물론 요즘은 초고 단계부터 컴퓨터에 직접 타이핑하는 작가들도 많다. 그러나 타이핑에 앞서 창작의 영감이나 재료는 대부분 촉이 왔을 때종이 위에 휘갈겨 쓴 육필 자료다.

나 역시 창작에 임하면 수첩이 없을 경우, 주변에서 얻을 수 있는 깨끗한 파지나 이면지에 떠오른 시재(詩材)나 영감을 끄적여 놓고 귀가하여 컴퓨터 앞에 앉는다. 십여 년 전 애연가 당시에는 주점에서 왁자지껄 중에 번뜩인 시어를 담뱃갑 은박지 뒷면에 황급히 휘갈겼던 추억도 떠오른다. 요즘 어떤 이는 핸드폰의 전자 메모장에 능숙하게 문자로 쳐넣기도 하지만, 내겐 종이 위에 손맛이 매겨지는육필의 생생한 꿈틀림에서 창작의 시동이 힘차게 걸린다.

 

얼마 전 신문보도에서 정부 인사혁신처 김모 사무관의 퇴임 소식이 작게 실렸다. 사무관이면 5급 공무원으로 중앙부처의 계선 조직상 중간층 실무진으로서 특별히 주목받을 만한 위치는 아니다. 그러나 그가 시선을 끈 것은 그의 퇴직 전 업무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김사무관은 이른바 필경사(筆耕士)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요즘 젊은 세대들은 붓으로 밭을 간다는 필경의 뜻을 잘 헤아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농부가 정성으로 밭을 갈아 한해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이 농심이다. 필경이란 농부가 밭을 갈 듯이 신실한 마음으로 붓을 잡아, 한 자 한 자 시대의 진실을 심는 일이다. 김사무관은 재직하는 동안 대통령 명의의 임명장을 매년 4000여장씩 정성스레 썼다고 한다. 그의 손에 쥐어진 붓과 먹물에 의해 작성된 임명장을 들고, 청렴강직한 이 나라의 많은 공직자들이 굳건한 사명감으로 국민들에게 봉사하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지방공무원으로 재직하다가 퇴임하면서 수여받은 훈장증서를 서재에 비치하고 있는데, 어느 필경사가 썼는지 모르지만, 나의 이름에 쓰여진 현묘한 먹물의 빛과 정자(正字)의 품위에 늘 무한한 영예로움을 느끼고 있다.

지난 봄 김사무관의 퇴임으로 육필 임명장 시대를 종식하고, 21세기에 걸맞게 AI로봇으로 손쉽게 임명장등을 뽑아내며, 필경사 보직을 없애자는 일각의 주장이 대두되었다. 이에 정부는 밭을 갈 듯이 정성스레 국정을 비옥하게 가꾸는 필경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후임자 채용공고를 냈다고 한다. 참으로 잘한 일이다. 어디 로봇으로 인쇄되는 영혼 없는 글자 따위와 고귀한 문자향(文字香)이 꿈틀거리는 육필의 수고를 비교할 것인가.

 

문득 지방공무원으로 재직하던 한 시절이 마치 가까운 어제처럼 떠오른다. 삼십 년전 쯤일까. 경기도내 00시청에 근무할 때의 추억이다. 당시 시청의 필경사는 정씨였다. 나는 주사보(主事補) 시절이었다. 필경사 정씨의 직급은 고용원(기능직렬)이나, 모두들 정주사로 불렀다. ‘주사라는 명칭은 6급 공무원으로 초급간부(계장 혹은 팀장)에 해당되나, 지방 공직사회에서는 편의상 호칭으로 6급이하 모든 직원에게 붙여 부르는 전통이 있다. 갓 임용된 9급 서기보에게도 김주사, 이주사 하면서 존칭해 주는 하위직 사회의 관습적 사례다.

정주사는 항상 발간실에서 붓과 먹물을 다루며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임명장이나 발령장 작업은 연말연시 인사철에 많이 발생하지만, 평상시에는 각 부서에서 의뢰해 온 무슨 계획서나 보고서류, 또는 증서의 정서작성(正書作成)으로 바빴다. 정주사와는 같은 부서직원으로 자주 어울렸다. 나보다 십 년 정도 선배라 스스럼없이 형처럼 대했다. 정주사는 필경사로서 붓을 잡는 고도의 정신집중을 유지하기 위해, 좋아하는 술도 항상 1차에서 마무리했다.

주흥이 무르익어 2차를 제의하면, 항상 그렇듯이 단호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던 말이 생각난다.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고 올곧은 직업정신이 아닐 수 없다.

내 업은 손 떨리기 시작하면 바로 아웃이야! 새끼들 봐서라도 정년까지 가야되지 않겠어?”

어느 주석에서 들은 이런 말도 기억난다.

나는 인사발령 날에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아. 다음날 줄 발령장을 써야 하거든. 어느 선배는 한잔 술에 일필휘지 한다고 하지만, 그건 음주필경으로 낙서와 같은 거야. 붓쟁이가 먹물을 마셔야지, 망각수를 마셔야 되겠어?”

그야말로 추상같은 직업정신과 책임의식으로 똘똘 뭉쳐진 공직자의 전형과도 같은 말이다. 그러나 나의 뇌리에 정주사는 매우 수줍음 많고, 인정미 넘치는 사나이로 아직도 기억되고 있다. 그 시절 관가(官街)에서는 공채출신으로서 글씨 잘 쓰고 호쾌한 기상을 가지고 있으면 대개 승승장구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정주사의 경우 공채출신이 아니어서인지, 그리 큰 족적을 보이지 않았고 후일 소식을 접할 수 없어 아쉬움이 느껴진다.

문득 떠오른 정주사와의 추억에 무척 그가 그리워진다. 나의 수차례 근무지 전출과 주거지 변동으로 이제는 소식이 끊긴 추억의 선배지만, 오늘 육필의 향기를 가늠하며 떠오른 그의 모습에 깊은 감회를 느낀다.

 

육필에 대한 최근의 기억도 떠오른다. 순수문학단체인 00문학회에서 다년간 편집주간을 맡았었다. 문학회의 창립자이자 명예회장인 000선생께서는 작품원고를 항상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원고뭉치로 제출했다. 선생께서 고령으로 몸이 불편하여 내가 직접 자택을 방문하여 원고를 수령했다. 책자발간 때는 수록작가 전원이 원고를 이메일로 송고하는 일은 현재 문단에서 당연시되는 현실이다. 모두들 한글 워드를 활용하여 컴퓨터로 작업하고, 이메일로 송고하는 패턴이 정형화된 시대다.

그러나 육필시대의 고령화 세대 문인들은 아직도 200자 원고지에 빼곡이 작품을 실어 제출하는 사례가 있다. 선생의 경우, 원고지도 아니고 지난 달력이나 재활용 종이를 공책 크기로 오려서 그 이면에 정성스레 시편들을 적어서 전해 주신다. 물론 편집이 끝나고 그 종이 원고반환은 원치 않으셨다. 그 시편들을 컴퓨터로 옮겨 치면서 선생의 진솔하고 소박한 시세계를 접할 수 있어 행복했다. 어느 해인가 자택을 방문한 자리에서 질문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의 이 종이원고는 항상 수정하거나 고친 흔적이 없이 정연하게 작품이 쓰여 있는데, 초고를 쓰시고 옮겨 적으신 것인지요?”

그러자 선생께서는 단호히 말씀하셨다.

흔히들 조탁(彫琢)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초심으로 떠오른 원래의 글을 다듬지 않네. 묵상으로 시상을 정리한 후, 그저 옮겨 적을 뿐이네. 시 한 편을 이리저리 어르고 굴리면 꼭 분칠하는 기분이 들어. 그래서 내 시는 내 손맛대로 눌러 쓴다네.”

지난 해 선생께서는 지병으로 별세하셨다. 지난 연말, 내 서재의 서랍 한 켠에 쌓여있던 선생의 상재가 끝난 육필원고 뭉치를 꺼내 다시 정독해 보았다. 모처럼 짙푸른 하늘이 펼쳐진 날, 경건히 묵념을 올리고 소각했다. 창활한 허공으로 흩어지는 글자들이 금빛 너울로 빛났다.

 

 

*팬문학 인천 지회장

 

 

[2023.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