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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석(sbs3039)
우리 나라의 시 낭송문화를 이끌고 계신 여류 몇 분이
공혜경 시인 시집 발간 축시 낭송 모임을 시작으로 다시 모였습니다
면면이 모두 다 시의 멋과 맛을 넓이 펴시는 운문의 전도사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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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사랑하기 바빠서 늙을 틈 없네*서봉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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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오리를 그린 천재 화가 김점선-문학인 신문에서 펌-
2024-11-12
조회수 : 40

 

이번 호에서 한명희 선생이 소개할 인물은 말과 오리를 좋아했던 화가 김점선(金點善; 1946년~2009년)이다. 한명희 선생은 김점선을 ‘천재 화가’라고 표현한다. 천재들은 원래 엉뚱한 짓 잘하고 반항 기질이 있다고. 김점선은 1946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이화여대 교육공학, 홍익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1972년 여름 제1회 앙데팡당 전(展)에서 백남준·이우환의 심사로 파리 비엔날레 출품 후보로 선정되어 등단한다. 이후 기존 관념을 초월한 그림으로 혹독한 비판과 찬사를 동시에 받았다. 1987년, 1988년 2년 연속 미술평론가협회가 선정한 미술 부문 올해의 최우수 예술가로 선정됐다. 《나, 김점선이야》 《10cm 예술》 《나는 성인용이야》 《김점선 스타일》 《바보들은 이렇게 묻는다》 그림에세이집과 그림동화책 《앙괭이가 온다》 《큰엄마》 등을 냈다.


김점선의 그림 속에는 오리가 날아다니고 빨간 말이 미소 짓는다. 사람들은 김점선 화가를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 일컫는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에는 해맑은 동심이 담겼다. 일상에서 상처받은 이들이 그림으로 위안 받는다.

1983년 첫 전시회를 연 뒤 20년 이상 개인전만 60여 차례 열었으며, 2002년부터 디지털 판화전도 개최했다. 한때 어깨 통증으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자 붓 대신 컴퓨터로 작업 시간을 늘렸다. 격식과 허례에 휘둘리지 않는 꾸밈없는 마음을 그림에 담았다.

“나는 하늘에 있어도 날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도 걷는다./ 나는 새가 아니다./사람일 뿐이다.// 나는 치마를 펄럭이면서 하늘에서 걷는다./ 맨발로 발가락을 쫙쫙 벌린 채/ 하늘에서도 걷는다./ 발가락 사이로 바람이 솩솩 지나간다./ 머리카락이 뒤로 훨훨 휘날린다./ 벌린 입 속으로 바람이 슉슉 들어간다.// 나는 하늘에서 걷는다./ 구름 사이를 힘차게 걷는다.”(김점선 <하늘 걷기>)


김점선의 말 그림
-처음에 어디서 만났는지 기억하세요?

“서울경찰청 인근 고급 한식당에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하던 이〇〇가 문화예술계 사람들 점심을 샀었지. 나는 그 사람은 잘 모르는데, 이재후 김앤장 법률사무소 대표 변호사의 초청을 받았어. 열두 명쯤 자리했었지. 마주 보고 앉아서 식사했는데. 이장호 감독 등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 그때 김점선 선생이 좀 늦게 왔어. 왜 우리는 상석에는 잘 앉지 않잖아. 그런데 웬 여성이 늦게 와서 방석을 발로 밀면서 상석에 떡 앉지 뭐야. 어려운 자리였을 텐데, 너무 당당하게 앉더라고. 뭐 예의 없다기보다 괴짜라는 생각이 들었지.”

-김점선 화가가 여기 덕소에도 왔었나요?

“그럼, 여러 번 왔었지. 우리 동네에 도자기 하는 김명선이라는 작가가 김점선 선생을 알더라고. 함께 우리 집에서 만났지. 또 서현숙이라는 KBS PD 하고도 아는 사이야. 그는 내 TBC 후배 방송인의 아내였지. 서현숙이 김점선을 잘 알았어.

2004년 8월 내가 서울시립대를 퇴직할 무렵 ‘퇴은 기념문집’ 《사허여적(沙虛餘滴)》을 냈어. 여기에 김점선 선생을 비롯해 김지하 시인, 오천 원과 오만 원권 화폐의 이율곡과 신사임당을 그린 이종상 선생의 그림을 실었어. “책 하나 내는데, 김 선생님 작품 하나 실었으면 좋겠다고 했지.”


왼쪽부터 《사허여적(沙虛餘滴)》 , 김지하의 그림 , 이종상의 그림

 


-김점선 화가가 했던 말 중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요?

“김점선 선생이 하루는 홍대 대학원 다닐 때 얘기를 해주었어. ‘사내 녀석들이 말이지요. 술 한잔을 하면 내가 여관으로 따라오라 하면 오지도 못해요. 그렇게 박력이 없어서 어떡해요.’ 밀양이 고향인 그가 또 이런 이야기를 했어. ‘고향의 낙동강에서 알몸으로 수영하면 사내 녀석들(고향 친구들)이 그냥 나와서 보면 되는데, 치사하게 숲속에 숨어서 몰래 봐요’라고. 말하는 게 거침없었지. 평범치 않았어.”

김점선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그가 암에 걸려 투병할 당시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를 읽게 되었다. 김점선은 예술가로서 밀려오는 슬픔에 종종 울곤 했는데, 그때마다 남편이 달래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한 예술가의 슬픔. 그래도 그의 남편만큼은 이해하고 공감해 주었던 것. 김점선은 언론에 전시 평이 좋지 않게 실려 속상할 때도 남편 앞에서는 펑펑 울 수 있었다고. 애틋하고 뭉클한 부부애다. 그런 남편이 나중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는 아내에게 당부했다고.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과는 죽을 때까지 싸우지 말고 살라고. 그래서인지 김점선은 박완서 선생과 각별하게 지냈다.

“나는 그 여자처럼 고정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자를 본 적이 없다. 아무도 그 여자를 길들이지 못한다. 그 여자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으니까. 사다리를 놓고 대작을 그리려니 했다. 그러나 웬걸. 그 여자는 컴퓨터를 이용해 수백 점의 그림을 그렸고 그 여자 특유의 막강한 입심까지 곁들어서 한 권의 책으로 내놓으려 하고 있다. 신기한 일이다. 제한된 화면에 손끝으로 그린 그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그 여자의 참을 수 없는 광기가 좁은 화면에 갇히기를 거부하듯 마음껏 분출하고 있으니….”(박완서 소설가, 《김점선 그리다》에서)

“김점선 화가는 권용태 시인(김점선기념사업회 회장)의 처남댁이지요?” 나의 물음에 한명희 선생은 권용태 시인의 글이 실린 ‘문학의 집·서울’ 소식지 제230호(2020년 12월)를 내밀었다. 권용태 시인은 이미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김점선 이야기를 했다. 권용태 시인과 김점선과의 첫 만남이 매우 특별했다.

“김점선을 처음 만난 건 아마 1974쯤 되었을 거예요. 팔월 염천에 아내와 버스를 타고 압구정 로데오 거리를 지나가는데, 겨울 외투 입은 한 여자가 산발한 채 칫솔 같은 것을 들고 지나가더군요. 그러고 나서 한 일주일쯤 후에 처남에게 연락이 왔어요. 결혼할 여자를 소개하고 싶다고요. 퇴근하고 집에 갔는데, 글쎄 압구정에서 봤던 그 여자가 내 안방에 반쯤 누워 있지 뭐예요. 내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한데 내가 들어가도 일어나지를 않아요. 처남이 결혼하겠다고 데리고 온 여자가 김점선이었던 거예요. 김점선은 나의 처남댁이 되었어요.”(2023년 11월 30일자 《문학인신문》 <만나고 싶었습니다>에서)

권용태 시인의 말에 따르면, 김점선은 우리 화단의 기인이었고 문인들이 무척이나 좋아했던 화가였다고. 특히 박완서와 최인호 소설가, 이해인 수녀, 장영희 서강대 교수, 가수 조영남 등과 친분이 있었다. 김점선기념사업회는 2013년 남산에 있는 ‘문학의 집·서울’에서 ‘문인들이 사랑한 화가 김점선’이라는 제목으로 추모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이 집 본채 반지하 서재에서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이야기하고 그랬지. 하루는 김점선 선생이 ‘선생님, 화투협회를 창설했어요’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아니 그런 게 있어요?’ 그랬더니, ‘그럼요’ 대답하더군. 내가 ‘회원이 많아요?’ 하고 다시 묻자, 그가 말했어. ‘조영남하고 둘이에요…’

한 달쯤 전에 어느 결혼식에서 조영남 씨를 만났어. 그래서 내가 김점선 씨가 언제 우리 집에 와서 화투협회 창설했다던데요? 그러니까 그가 씩 웃더군. 또 작은 에피소드가 있어. 강미자라고 경남대학 음악과 교수를 했던 이가 있었지. 그는 평양 태생으로 일곱 살 때 남쪽으로 내려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음악 공부를 했지. 그가 김점선 선생하고 친했어. 강미자 교수와 김점선 선생 이야기를 했었지. 강 교수가 말했어. ‘제가 무꾸리(무당이나 점쟁이가 길흉을 점침)를 봤는데, 당신 신발에 액운이 붙었다, 그러는 거예요. 신발을 버려야 하는데 아무 데나 버리지 말고 경찰서에 버리라고요.’ 강미자 교수가 김점선에게 그 얘기를 한 거야. 자신은 못 할 일이라고. 그러자 김점선은 뭐가 어렵냐며 자신이 해주겠노라, 그러더라는 거야. 그 길로 김점선이 종로경찰서로 갔대. 경찰서에 들어가니 어떻게 오셨냐고 그러더라지. 그가 형사과장 만나러 왔다고, 날짜와 시간을 약속했다고 말했다지. 그러고 들어가서 휴지통에 신발을 버리고 왔다는 거야. 보통 사람들은 못 할 일이잖아.”

 

 



-한 마디로 김점선 선생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여성스럽지는 않았어. 그러나 속이 찬 여자였지. 머리만 좋아서 엉뚱한 짓 하는 게 아니라, 세상 이치를 다 아는 사람인 거지. 속이 찬 천재라 할 만하지. 그는 그림 그릴 때는 아파트에서도 나오지 않았다더군. 경비원이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식음을 전폐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거야. 기인이었던 거지. 최인호 소설에 김점선이 삽화를 그렸지. 천재가 천재를 알아보았을 테지.”

“내가 아는 김점선은 황금의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야생마다. 이런 미친 말이 우리의 삶을 짓밟고 다니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광란하라 점과 선이여. 우리의 곁에서 마음껏 춤추라.”(최인호 소설가, 《김점선 그리다》에서)


김명선 도조 작가의 도자기에 김점선 화가가 그린 말 그림(왼쪽) 김점선 화가와 김명선 도조 작가(오른쪽)
한명희 선생은 인터뷰 도중 인근에서 도자기 도예 조각을 하는 김명선 도조 작가를 불렀다. 김명선 작가는 김점선 화가와 친분이 있었던 것. 김 작가는 1999년 서초동에서 김점선 작가와 함께 전시했던 이야기를 풀어놨다. 한명희 선생은 “우리가 그때 만난 게 언제였지?” “선생님과 제가 따로 점선 언니를 알고 지내다가 여기서 만난 게 2000년대 넘어서였어요.” “그때 서현숙 선생과 함께 만났잖아?” “서 선생님과 김점선 언니가 함께 왔는데, 그때 선생님이 저를 부르셔서 그때 여기서 함께 본 거죠. 점선 언니를 추모하는 모임이 있었어요. 서현숙 선생님이 아마 그 모임의 멤버일 거예요. 그들이 점선 언니 그림을 보존하는 데 애썼던 걸로 알아요.”

김점선 화가는 다시 태어나면 오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어쩌면 그는 정말 오리가 되어 하늘을 날고, 물속을 헤엄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약하지 않은 새, 씩씩한 오리 말이다. “오리는 내가 무지하게 좋아하는 동물이다./ 어릴 때 이가 아파서 치과엘 다녔다./ 약솜을 꽉 눌러 물고 터덜터덜 걸으면서/ 오리를 부러워했다. 오리가 되면 좋겠다./오리는 이빨도 없고 아무거나 먹고/ 이도 안 닦고 그냥 자도 되고,/ 헤엄도 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매일 물속에서 노니까 목욕탕에 안 다녀도 되고./ 급하면 날기도 하고,/ 좀 커서는 오리가 좀 둔하고 튼튼해서 좋았다./ 다른 새들은 연약하고 가볍고 만지면/ 죽을 것같이 위태롭게 보이는데/ 오리는 궁둥이를 퍽퍽 때리고 내려놔도/ 금방 씩씩하게 달려가는 게 좋았다.”(김점선 <오리>)

 


☞한명희

1939년생. 서울대 국악과, 동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 박사, 카자흐스탄 알마티음악원 명예박사,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 음악원 명예박사이다. TBC(동양방송) PD, 서울시립대 교수,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문화예술 회원이며 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이다. 저서 《하늘의 소리 민중의 소리》 《우리가락 우리문화》 《사허여적(沙虛餘滴)》 《한국음악, 한국인의 마음》 《하늘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한악계의 별들》 《DMZ는 이렇게 말한다》 등이 있고, 역서로 《음악사조사(音樂思潮史)》가 있다.

 

출처 : 문학인신문(http://www.munhaki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