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4.08.14 16:22
- 수정 2024.08.14 23:41
- 기자명강수연 기자
서울문화재단 블로그 입니다
공혜경 시인 시집 발간 축시 낭송 모임을 시작으로 다시 모였습니다
면면이 모두 다 시의 멋과 맛을 넓이 펴시는 운문의 전도사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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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목 작사가 한명희 선생의 교유록 ⓻] ‘농무’ ‘목계장터’의 시인 신경림
‘농무’ ‘목계장터’의 시인 신경림
한명희 선생은 충주고등학교 선후배 사이였던 신경림(申庚林, 1936년~2024년) 시인과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지난 5월 22일 향년 89세에 별세한 신경림 시인은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문리대 영문과를 나왔으며, 1956년 이한직 선생 추천으로《문학예술》에〈갈대〉 <낮달> <석상>을 비롯한 시들을 발표했다. 고향에 내려가 10년 동안 절필했다가, 1965년 김관식 시인의 손에 이끌려 상경하여 <원격지> <산읍기행> <시제> 등을 내놓았다. 1971년 《창작과 비평》가을호에〈농무(農舞)〉〈전야(前夜)〉〈서울로 가는 길〉등을 발표했다. 이후 시골의 흙냄새 생활인의 땀 냄새 짙은 시를 쓰고 농민문학·민중문학을 주제로 평론을 썼다. 만해문학상, 단재문학상, 대산문학상, 호암상 등을 수상했으며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동국대 석좌교수를 지냈다.
신경림 시인은 현실의 부조리와 불의에 맞서 싸워온 민족시인, 힘없는 이들의 노래를 불러준 민중시인이라 불린다. 한때 그가 시와 동떨어진 생활을 하며 살아간 적이 있었는데, 그 무렵 그는 광산과 공사장 등에서 일하며 노동자의 삶을 경험한다. 1980년대 무렵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그들은 몇 가지 서로 공통되는 점을 가지고 있었다. 한결같이 가난했고, 세상에 대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복수심과 체념으로 조금씩 비뚤어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전혀 그들 탓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로지 역사의 피해자요, 체제적 모순의 산물이었다.” (신경림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 <내 시의이야기>에서)
시인은 소외된 이들의 삶을 노래했고 사람들은 그의 시로 위안받았다. 그의 세월은 역사와 함께 힘겹게 흘러갔다. 2014년 《사진관집 이층》(창비)이라는 시집을 내며 이야기한다. “늙은 지금도 나는 젊었을 때나 마찬가지로 많은 꿈을 꾼다. 얼마 남지 않은 내일에 대한 꿈도 꾸고 내가 사라지고 없을 세상에 대한 꿈도 꾼다.” 굽이진 길을 헤쳐 온 시인은 여전히 같은 꿈을 꾸었을까. 평생 낮은 곳에 시선을 두었던 시인은 지난 5월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시인은 그의 시 <낙타>의 시구처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길을 나섰을지도 모르겠다.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말이다.
-신경림 시인이 고등학교 선배시죠?
“충주고등학교 출신 예술원 회원은 세 명이야.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그리고 나까지. 1980년대 월간 《마당》이라는 진보 잡지가 있었는데, 그때 한 여기자가 우리 집에 와서 글 청탁을 해서 내가 몇 번 써줬어. 우리 집으로 잡지를 보냈었는데, 그때 신경림 시인이 그 잡지에 <민요기행>을 연재하더군. 하여간 그때 신경림 시인이 잡지 편집을 자문해주었던 것 같아. 《마당》 지를 통해서 선배라는 걸 알고 관심을 가졌지. 다들 알다시피 그는 그 무렵 저항 기질이 있었지.”
-결정적인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황명걸이라는 시인은 평양 출신으로 해방 이후 월남해 서울에서 살았지. 서울대에서 불어불문학을 공부했어(1962년 《자유문학》에 <이 봄의 미아>가 당선되며 등단했고 1967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시인은 1975년 자유언론 운동으로 신문사에서 해직됐다). 그가 동아일보에서 해직되고 나서 양평군 양서면 북한강 변에서 갤러리 카페를 냈지. 나는 어떻게 그곳에 신경림 시인과 같이 가게 되었어. 내 차로 모시고 갔지. 김대중 정부 시기 청와대 민정수석과 문화부 장관을 하던 김성재 씨 같은 사람들이 모였던 걸로 기억해.
신경림 시인은 황명걸 시인과 아주 친했지. 황 시인은 양평군 양서면에서 카페를 하다가는 접어버리고 양평의 한 아파트에서 살았어. 그때 두어 번 신경림 시인을 차로 모시고 갔던 기억이 있어. 그곳에서 함께 술을 마셨지. 두 사람 모두 술을 좋아했으니까. 황명걸 시인은 양평에서 알아주는 시인이지. 시비도 세워주었으니까. 황 시인은 맥주는 아예 안 하고 완전히 소주를 마셨고 신경림 시인은 가리지 않았어. 그래도 막걸리를 자주 마셨지.”
-이곳 이미시문화서원에도 초청했었나요?
“신경림 시인이 시집 《사진관집 이층》(2014년도 창비 출판)을 발간했을 무렵 그를 서원에 모셔놓고 요즘 말로 북토크를 했었지. 낭송가들이 신경림 시인의 시를 낭송했어. 시인은 유년 시절 이야기를 풀어냈고 소프라노 강미자가 솔베이지의 노래를 불렀지. 그때 서원에서 문학 동호인들이 정기적으로 시 낭송 공부를 했거든. 그들이 청중이었어. 이후 황명걸 시인도 북토크를 했었지. 그러다가 현충일 행사니, 중앙아시아 교류니 바빠서 중도 하차했지. 그때 녹화라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못했네.”
-신경림 시인은 어린 시절 남한강 변에서 살았지요?
“그가 쓴 <목계장터>라는 시가 있지. 목계가 왜 유명하냐면 배로 모든 물자 교류했던 곳이거든. 목계 나루는 남한강 변에서 장이 서던 나루였고 서울로 향하는 뱃길이었으니까. 북한강 쪽에서는 나무를 실은 배가 오고, 남한강에서는 쌀 같은 생필품을 실어 날랐는데, 남한강 상류였던 목계에 집산 창고가 있어서 거기에 물자를 보관했었지. 신경림 시인의 아버지는 면서기, 농협 서기를 했던 걸로 알아.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 속을 썩였다고. 그래서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정이 없었다는, 뭐 그런 얘기를 들은 것 같아.”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목계장터>에서)
신경림 시인과는 사제지간인 이재무 시인은 그의 산문집 《생의 변방에서》 4부에 <우리시대의 민족시인 신경림>을 실었다. 이 글에 따르면, 신경림의 부친 신태하(申泰夏)는 농협 서기 등을 하다가 광산에서 덕대(광산의 하청업자) 등으로 일했고 금방앗간과 금 분석소도 경영했다. 부친은 신경림의 나이가 열아홉에 이를 즈음에는 논 판 돈으로 약사와 함께 동업하여 약방을 경영하기도 하였으나 크게 실패하고 만다. 그의 부친은 일보다는 술과 친구들을 더 좋아했다. 하숙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신경림은 이른바 떠돌이 생활을 시작한다. 입주 가정교사와 외국 소설들을 번역하여 가까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조달했다.
삼촌 신태은(申泰銀)은 6·25전쟁 때 시류에 휩쓸려 희생당한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이었고 신경림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고. 당시 소년 신경림은 그의 삼촌의 억울한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후에 그때 겪은 아픈 경험을 살려 시 <폐광>에 옮겨 놓는다.
-신경림 시인의 어떤 시를 좋아하세요?
“시골에서 살았으니, 주변에 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겠지. 그걸 보면서 연민의 정을 느꼈을 테고. 글 쓰는 사람들이 다감하니까. 자기는 굶지 않아도 당시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때였지. 그의 시에는 서민들의 애환, 시골 사람들의 땀 냄새 흙냄새의 투박함이랄까 순박함 그런 것들이 에센스로 녹아 있는 듯해. 나는 그냥 간단하면서 생각하게 하는 시가 좋더군. <갈대> 같은 시 말이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갈대> 전문)
-평소 외모는 어떠셨나요?
“넥타이 맨 거 못 봤고 점퍼를 걸친 채 그냥 항상 소탈했지. 키도 작고 얼굴도 동그란 게 웃는 상이었어. 속이 음흉한 게 아니라, 솔직하고 투명한 거지. 과장된 어법이라고는 없었어. 자기 스스로 겁이 많대. 겁쟁이래. 정보부 끌려갔을 때 어머니가 와서 우리 아들은 겁이 많아서 그런 데 가면 기절한다고 그랬대. 저항 시를 쓴 걸 보면, 소신이 뚜렷했던 거지. 소신까지 굽혀가면서 겁에 질리지 않은 거야.”
한명희 선생은 신경림 시인과 함께 고향에 내려갔던 적이 있다고 한다. “둘이서 내 차로 가서 시청 문화예술과장을 만나고 그랬어. 신경림 시인은 가는 도중 차 안에서 한겨레 신문사에서 온 전화를 받았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가결됐다는 내용이었어. 언론사에서 바로 연락하는 걸 보고 역시 진보의 대부답다는 생각이 들더군.”
신경림 시인 고향은 노은면 연하리는 충주호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고 한다. “우리가 찾아간 곳이 문화리라는 곳이었는데, 신경림 시인은 ‘이렇게 아름다운 곳도 있나, 내 고향인데도 몰랐네, 라고 감탄하더군. 동네 이름도 문화리 아니냐, 여기다 문화예술 도시를 만들면 명실공히 예술의 중앙 도시가 아니겠느냐’고 말이지.”
-국악원장 하실 때 신경림 시인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 순국 기념행사를 했다고요?
“1998년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 순국 400주년 기념행사에 신경림 시인이 참석했었지. 해군함정으로 진해에서 통영까지 충무공의 해전지를 돌며 추모 공연을 했어. 그때 신경림, 민영 시인을 모셨고. 신경림 시인이 행사 마치고서 시를 써주었어. 그 시는 국악원에 소장하고 있을 거야. 화가 이만익이 그림을 그렸고. 국악원 단원들과 판소리 하는 박동진 선생님 같은 분들을 모시고 갔는데,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어. 박동진 선생이 행사 며칠 전에 담낭(쓸개) 수술을 받았더랬어. 내가 무리하면 안 되므로 행사 참여를 만류했지. 박동진 선생은 쓸개 없는 사람이지만, 꼭 가겠다고 고집했어. 자신은 공연 무대서 죽는 게 소원이라면서. 박 선생님은 창작판소리 ‘성웅 이순신전’을 공연했어.”
이밖에 한명희 선생은 2006년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100여 명의 문화계 인사들과 대규모 공연을 했을 때도 신경림 시인과 동행했다. 신경림 시인은 그때 <초원에서>라는 시를 써주었다고. “저 광활한 초원은 우리네 조상들이 양 떼를 몰던 곳이다/ 우랄산맥 그 추운 바람을 맞으며/ 따뜻한 고장 찾아 흥안령을 넘어 바이칼호를 건너/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르던 곳이다 그 노래(하략)”
한명희 선생은 인터뷰 도중 ‘산천초목’이라는 신경림의 펜클럽 회원인 김주섭 연극 연출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윤호진 연출가와 함께 뮤지컬 ‘명성황후’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산천초목은 매달 첫째 목요일(그래서 초목)에 신경림 시인을 모시고 점심을 먹었다고. “이 모임은 한 10년이 되었다고 해. 신경림 시인은 나중에는 건강상 참석하지 못했다네. 나는 가끔 이 친구에게 전화해서 시인의 안부를 물었지. 신경림 시인과 마지막 점심을 한 게 2016년이었어. 왜 극작가 신봉승, 방송인 최창봉, 강영훈 총리가 그해에 모두 돌아가셨잖아. 신봉승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문상 가서 신경림 시인을 만났어. 그는 이미 문인들과 술을 마시고 있더군. 우리는 잠실 네거리 롯데캐슬 2층 중국집으로 자리를 옮겨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어. 유종호 선생과 황명걸 시인 안부도 묻고 말이야.”
☞한명희
1939년생. 서울대 국악과, 동 대학원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 박사, 카자흐스탄 알마티음악원 명예박사, 우즈베키스탄 타슈겐트 음악원 명예박사이다. TBC(동양방송) PD, 서울시립대 교수,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문화예술 회원이며 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이다. 저서 《하늘의 소리 민중의 소리》 《우리가락 우리문화》 《사허여적(沙虛餘滴)》 《한국음악, 한국인의 마음》 《하늘의 음악이란 무엇인가》 《한악계의 별들》 《DMZ는 이렇게 말한다》 등이 있고, 역서로 《음악사조사(音樂思潮史)》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