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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 천사
권 혁 수
나비와 벌이 산책길에 핀 들꽃 위에 내려앉아 꿀을 빨고 있었다.
『이제 완연히 봄이네요!』 라고 내가 말했다. 그러자 함께 걷던 이웃에 사는 농부가 대뜸 말을 받는다.
『농약을 칠 때가 되었네요.』
꿀벌을 치는 C선생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도 반년이나 지났다. 어제도 얼굴을 본 듯한데, 어느 새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다니 참으로 화살처럼 빠른 게 세월이구나 싶었다.
C선생은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 인근 습지에 농막을 짓고 홀로 꿀벌을 치며 살던 양봉가이자 색소폰 연주자였다. 나보다 4살이나 위였는데 심성이 너그럽고 부드러워 틈 날 때마다 만나 기탄없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하루는 내 거처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나는 그가 혼자 사는 내력이 궁금해 『왜 결혼 안 했어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전에도 나처럼 묻는 사람이 많았던지 거부반응 없이 담담하게 사연을 들려준다.
사연은 그랬다. 군대 제대 무렵, 결혼하기로 약속한 여자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반대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여자 역시 가족이 환영하지 않는 결혼은 할 수 없다며 떠나버려 그 충격으로 서울로 상경하여 클럽에서 색소폰을 불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고향으로 돌아와 이렇게 벌을 치며 산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나 그 여자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아버지의 반대로 여자를 잃어버리긴 했으나 그 대신 꿀벌과 색소폰 소리를 만나지 않았느냐. 이제 꿀벌은 자기의 몸이고 색소폰 소리는 자기의 영혼이라 정리했다. 하지만 내 눈엔 그의 마음속에 아직도 그 여자가 어슴푸레하게나마 살아있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순애보랄까, 가슴이 짠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의 전설 같은 사연을 다 듣고 나서 내가 쓴 <네가 없어도>란 졸시와 유튜브에 올린 가곡(김수호 작곡)을 들려주었다.
<네가 없어도>
네가 없어도
꽃잎은 흩어져 저 산 위에 노을이 되었구나
빗방울 떨어져 저 산 아래 강물이 되었구나
꽃잎 밟고
노을 진 저 산 고개 넘어 떠나간 사람아
비에 젖어 그리운 사람아
꽃은 피고 지는데
강물은 흘러가는데
네가 없어도
가슴에 피는 꽃노을
가슴을 적시는 꽃비
사실 그의 꿀벌 밀원은 백두대간 자락인 대관령 인근 깊은 산속에 있었다. 그곳이 겨울에 너무 추워서 피한 차 남쪽인 이곳에다 벌통을 옮겨다놓고 농막에서 봄까지 지내다 싸리꽃이 필 무렵이면 다시 벌통을 트럭에 싣고 알프스 고원의 목동처럼 떠나곤 했다.
지난해 봄에는 떠나면서 여름에 아카시아 꽃이 피면 놀러오라고 내게 말했었다. 그곳에 오면 밀원을 구경시켜주고 색소폰 연주를 멋지게 들려주겠노라 했다. 하여 나는 학수고대(鶴首苦待), 아카시아 꽃이 필 때를 기다렸고 휴가를 내서라도 꼭 가야겠다, 다짐을 했었는데, 무슨 바쁜 일이 있었는지 실행을 못하다가 그만 그의 부음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의 아름다운 밀원을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지만 색소폰 연주를 듣지 못한 게 더 아쉽고 안타까웠다.
나는 며칠 전 점심시간에 그가 떠난 습지의 텅 빈 농막 터에 들어가 보았다.(장례 후, 그의 동생이 찾아와 농막을 철거하여 깨끗이 정리가 돼 있었다.)
그 황량한 공간에 그가 마술처럼 다시 나타날 것 같은 어떤 존재감이 드는 것은 아무래도 그와 함께 그 공간을 오가며 나눴던 짧지만 다정했던 기억이 그렇게 회상이란 절차를 통해 감회를 느끼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랬다. 한가한 때면 그는 나의 작은 텃밭에 와서 농사 지도를 해주었고 함께 다과를 나누거나 저녁을 먹었다. 정서와 코드가 맞았다고나 할까, 게다가 서로 술이나 담배를 즐기지 않았으므로 대화는 흐트러짐이 없었고 매우 편안했다. 물론 그는 췌장암수술을 했으므로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느라 그랬기도 했겠지만 그러나 어느 날은 좀 부담스러운 날도 있었다. 그것은 내 거처에서 함께 저녁을 먹는 날은 다음날 반드시 벌꿀을 한 병 현관 앞에 갖다놓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그가 놓고 간 꿀병을 고맙게 생각하며 농막 자리와 습지 주변을 더듬어 걸었다. 습지에는 그가 피라미 낚시를 했던 작은 연못도 있었으므로 그쪽으로도 걸었다. 연못엔 내가 연꽃 씨를 한줌 뿌려놓았었는데 연꽃은 언제 싹이 나고 꽃이 필지 알 수 없었지만 혹여 주변에 그가 남긴 발자국이라도 있을까 발밑을 살피며 걸었다. 하지만 발자국은 찾아볼 수 없었고 무엇인가 발끝에 둔탁하게 걸리는 게 있었다. 살펴보니 붉은 벽돌이었다. 그가 벌통을 안정되게 괴느라 사용했던 받침이었으리라. 땅속에 반쯤 파묻혀있는 벽돌도 몇 개 더 눈에 띄었다. 나는 그 가운데 온전한 것들을 몇 개 골라 연못물에 씻어보았다. 그런대로 쓸 만했다.
거처인 아파트로 가져와 거실 창문 앞에 네 장씩 두 줄로 쌓고 인근 가구공장에서 합판을 얻어다 간이책장을 만들어보았다. 시골에서 학교 다니던 시절에 책장 살 돈이 없어 만들어 썼던 간이책장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책장을 꾸미고 책을 꽂고 나니 책을 꺼낼 때마다 마치 그에게서 책을 대출받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가슴이 뭉클했다.
차제에 언제가 그 붉은 벽돌처럼 나 역시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겨질 것인가 잠깐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머릿속을 휘저어 보아도 뭐랄까, 걸리는 게 없었다. 신분이 낮으니 사회적으로 자랑할 만한 업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남들과 공감할만한 글 한 편 제대로 쓴 것도 없다보니 그저 가슴만 답답했다. 그러다 문뜩 C선생이 남긴 이 붉은 벽돌을 끝끝내 간직한다면 혹여 그 누군가도 나처럼 간이책장을 짜거나 어느 가구의 받침으로 사용하다 나를 C선생처럼 추억해줄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생각이 들어 책장 앞에서 혼자 씁쓸히 웃었다.
그의 동생 말에 따르면 그의 유해는 화장을 하여 납골당에 부모님과 함께 안치되었다고 한다. 납골당은 방역 상 사방이 꽉 막힌 공간이라 전혀 벌이 날아들 수 없을 것이고 그가 좋아하는 색소폰 소리도 없을 텐데 저승에서 어떻게 지내려나 싶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사무실창문 틈으로 꿀벌이 한 마리 날아들었다. 마치 C선생이 키우던 꿀벌이 C선생 대신 나를 찾아온 것만 같았다. 나를 향해 날개를 파닥인다. 그 날개 소리는 마치 그가 들려주지 못한 색소폰 소리를 내게 들려주는 것만 같았다. 은근하고 달콤하고 향기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