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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석(sbs3039)

세월에게는 정지 신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벌써 해거름 녘
세상이 붉게 저물어 가고 있다

*축 김리영 시인 새 시집'푸른 목마 게스트하우스'출간*







시詩사랑하기 바빠서 늙을 틈 없네*서봉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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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향기 남편의 냄새 /수필 권혁수
2023-12-20
조회수 : 358

아내의 향기 남편의 냄새

 

권 혁 수

 

거실 탁자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향기가 은은히 느껴졌다. 무슨 향내일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창가에 놓여있는 난()화분에 꽃이 피어있는 것이었다. 저지난해, 아내의 생일 선물로 처제가 보내온 축하 화분이다.

 

나는 난향(蘭香)을 더 짙게 맡고 싶어 화분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 꽃술에 코를 대보았다. 그런데 왠지 탁자 앞에 앉아서 느꼈던 향기보다 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난향은 내가 가까이 다가간다고 더 많이 허락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찾아올 때까지 인내(忍耐)를 갖고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보다 하고 생각하자니, 나도 모르게 마하가섭처럼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 게 아닌가. 아주 맑게.

 

저녁에 아내가 식탁에서 <돌아온 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TV 프로 <세상에 이런 일>에서 방영한 유기견 이야기였다. 경기도 광명에 사는 H씨가 우연히 키우게 됐던 유기견을 사정상 유기견보호센터에 인계하게 되었는데, 센터는 이 개(이름 로또)를 파주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모씨에게 분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개가 농장을 탈출하여 장장 25일 만에 55Km나 떨어진 H씨네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미담이었다.

전문가 말에 따르면 개는 시각과 후각이 발달해 본능적으로 사람보다 더 냄새를 잘 맡고 풍경도 잘 기억할 수 있어 입양되는 과정에서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지역의 고유냄새와 풍경을 기억했다가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도 한 가지 개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누나네 가족이 서울 전농동 광석이네 집에서 함께 살다가 장안동 아파트로 이사를 한 때였다. 광석이네 점박이발발이가 3년이나 지난 어느 여름날인가, 10 리나 떨어진 장안동 누나네 아파트를 찾아왔던 것이다.

매형이 그 발발이를 엄청 귀여워해줬었는데 한동안 그 집에서 가까운 전농동 로터리를 지나 오토바이로 출장을 다녔던 적이 있었다. 아마 그때 매형의 냄새를 맡고 매형의 오토바이가 지나다니는 길을 따라 찾아오지 않았나 싶다.

 

한편 미국의 어느 TV에서는 여성출연자들의 남편 속옷을 늘어놓고 자기 남편의 속옷을 찾아내는 게임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여자들은 옷 스타일과 옷에 밴 남편의 냄새를 맡고 다들 잘 찾아냈다. 물론 시간상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틀림이 없었다. 같은 게임을 그 여자들의 남편들을 상대로 벌였다면 과연 어땠을까? 아마 추측컨대 거의가 다 실패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자들은 계절마다 다양하게 향수를 쓰고 옷을 분위기에 따라 갈아입는 습성이 있기에.

 

그렇듯 여자가 남자보다 냄새에 더 민감한 것 같다.

언젠가 꽤 오래 전에 누나네 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외삼촌이나 큰오빠가 피우는 담배연기 냄새는 싫은데, 작은오빠가 피우는 담배연기 냄새는 구수하고 좋다!라고.

그 조카딸은 작은오빠를 누구보다도 좋아했던 것 같다.

결국 냄새란 호감이나 사랑 같은 각자의 감성에 따른 인식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난()은 좋아하고 사랑하는 애호가들이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은 게을러야 꽃을 볼 수 있다고. 그 말은 난의 뿌리가 마르면 생존에 대한 위기감이 들어 난이 서둘러 종자를 퍼뜨리고자 한다는 것. 따라서 꽃대를 올리고 꽃술을 터뜨릴 때까지 감상자는 게으른 듯 난에게 물을 주지 말고 인내를 갖고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심정으로 난()을 노래한 고죽 최경창의 시를 한 수 음미해보자.

 

<이별하며 드리네>

서로 오래오래 마주보자고 향 그윽한 난초를 드리네

저 하늘 끝 먼 곳으로 가는 듯 수일 내 돌아오리니

함관령 옛 노래는 부르지 마소

지금 청산이 짙게 비구름에 싸여 있나니.

 

贈別

相看脈脈贈幽蘭, 此去天涯幾日還 (상간맥맥증유란, 차거천애기일환)

莫唱咸關舊時曲, 至今雲雨暗靑山(막창함관구시곡, 지금운우암청산)

 

이 시는 고죽 최경창이 기생 홍랑에게 써준 이별의 시다. 정치적 상황으로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는 됐지만 난초(선비의 전형, 최경창 자신)를 화분에 심어 보내니 다시 만날 날까지 서로 향기롭게 그리워하며 참고 기다리자고.

사실 이 시는 일찍이 최경창과 홍랑이 함경도 함관령 고개에서 이별할 때 홍랑이 먼저 써주었던 시조에 대한 답시(答詩)이다. 홍랑의 시조도 함께 음미해보자.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곳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묏버들은 아무 땅에나 꽂아도 산다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버드나무다. 곧 뭍 사내의 품에 안겨 살아가야하는 처지의 기생인 홍랑 자신을 비유한 것이다.

이 시조는 그들의 러브스토리와 함께 널리 회자되었고 금세기에는 국어교과서에도 실려 오래오래 기려지고 있다.

 

홍랑의 방 안에 그윽했을 난 향기와 최경창의 창가에 돋은 버들잎의 연두빛이 430년이 지난 이 겨울에도 마음의 눈앞에 푸르고 성성(惺惺)하다. 우리 아파트 거실의 난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