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AS

검색영역

서울문화재단 블로그 입니다

서봉석(sbs3039)
시 처럼 살기
-벽년해로-

아직 내어줄
가슴이 있고
기댈 어깨가 있으니
우리 백년해로에
아쉬울 일 없다
부부란 서로에게 마음이 되어 주는 일로
정 나눔 하는 사이





시詩사랑하기 바빠서 늙을 틈 없네*서봉석

블로그 상세 보기

이원숭과 '하늘 천 따지'
2024-05-19
조회수 : 186

 

서재 안팎의 비화. 11▮

 
이원승과 ‘하늘천 따지’
개그맨 이원승과 나 사이에 어떤 인연이 맺어질 줄은 꿈에서도 상상 못 할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연출가 강영걸이 우리 사이에 다리를 놓은 꼴이었다.
1992년에 강영걸이 개그맨 이원승과 함께 내가 쓴 모노드라마『가리왕의 땅』으로 연극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내 머리에는 아무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그저 엉뚱하단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내가 강영걸만은 믿을 수가 있었기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았고, 작품의 제명이 너무 딱딱 하다는 말을 해서, 그럼『하늘 천 따지』로 하자며 즉석에서 개명까지 해 주었다.
강영걸은 내 십정을 지레 짐작 하고서, 이원승을 대충 다음과 같이 나에게 소개하려 들었다.
「그간 개그맨으로 알려졌지만 원래는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이고, 대화를 나눠보니 연극적인 의식 또한 분명해서 신뢰가 가는 친구더라.」
이원승은 1982년에 MBC 개그콘테스트에서 동상을 수상, 방송계에 데뷔했으며「청춘행진곡」,「일요일 밤의 대행진」등에 출연하게 되면서 시청자들에게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개그맨 생활을 하다 보니, 스스로가 매너리즘에 빠졌음을 자각하고, 그는 부인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충전의 기회를 갖기 위해, 연극에 도전할 결단을 내렸다고 했다.
처음에 그는『빨간 피터의 고백』이란 모노드라마를 레퍼토리로 채택한 다음, 강영걸에게 연출을 의뢰하려든 모양이었다. 그러자 강영걸이 내 작품을 추천했단다.
왜냐하면『빨간 피터』의 경우 그에게 적격이긴 하지만, 옛날에 추송웅이 워낙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기에, 그를 능가한 연기라는 평가를 받기가 어려운 일이 될 테니, 차라리 새로운 작품을 선택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충고를 한 모양이었다.
그들의 연극 연습장은 여의도에 있었다. 연락을 받고 가 보니 연기자 이원승의 옆에 예쁘장한 아가씨 한 사람이 앉아 북을 두드리며 추임새를 넣고 있었다.
그녀가 바로 오정해였고 미스 춘향 출신이며, 명창 김소희 문하의 판소리 이수자라고도 했다. 첫인상에 붙임성도 좋고 대인관계 매너도 좋았지만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었다.
강영걸은 자기를 향한 그녀의 호칭이「선생님이 아니라 왜 삼촌인지」모르겠단 말을 하기도 했다. 내가 듣기에는 강영걸이 그 까닭을 모를 리도 없었다.
연극『하늘 천 따지』의 제작자 또한 이원승이어서, 그는 아예‘하늘 땅’이란 이름으로 극단 등록을 하기도 했다.
내 기억에 의하자면 1992년 7월 1일부터 8월 16일까지 바탕골 소극장에서 초연의 막을 올리기까지 4천 만원 정도의 총제작비가 들었다.
초연의 막이 내리기 이틀 전까지만 해도 2천만 원이 적자였는데, 마지막 4회 공연에서 2천만원의 입장료 수입을 올려 적자폭을 채웠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 작품의 초연 중에 고수 오정해가 영화감독 임권택의 눈에 들어 픽업 당한 다음 영화『서편제』의 주인공이 되는 행운을 잡기도 했다.
연극 연습이 진행되는 동안 이원승 부친이 서천에서 직접 내린 민속주를 한 되 병에 담아다 주었는데, 강영걸과 내가 그 자리에 앉아서 그 술을 다 마셔 버렸더니, 이원승이 두 손을 번쩍 들기도 했다. 그 민속주가 너무 독해 몇 잔 마시면 일어서지도 못한다며「앉은뱅이 술」이라는 별명까지 붙어 있는데, 한 자리에서 우리가 한 되 병을 다 비웠으니 당장 내일이 걱정된다는 뜻이었다.
초연 이후 이원승은 간헐적이긴 하지만, 약 3년여 동안『하늘 천 따지』라는 그 연극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 순회공연을 계속했다. 그가 해외 공연을 다녀오면 간혹 간단한 선물로 작가라는 나에게 인사를 하는 예우도 잊지 않았다.
그 작품의 공연이 끝나자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은 생겨나지 않았는데, 이원승이 이혼을 했다는 소문도 들렸고, 이탈리아에 가서 피자 굽는 기술을 배워 대학로에 피자전문점을 차렸다는 소문도 들렸다.
아, 언젠가 한 번은 그가『하늘 천 따지』의 초연 멤버들을 초청, 자기 가게에서 피자 파티를 열어 준 적도 있었다.
다른 한편 나는 몇 곳의 공연장에서 이원승의 여동생인 이혜정을 만나기도 했는데,『하늘 천 따지』가 초연될 때 매표구에 앉아 있던 그 아가씨가 일본 유학에서 박사 코스까지 마치고 중앙대학 연극학부 강단에 서게 됨과 동시에 통역 내지 일본 연극의 안내 역 등을 담담하게 된 모양이었다.
2011년 정초였다. 지난 연말 경에 내가『한국동인극단 50년사』란 책을 양장본으로 발간 했다. 계간 잡지「극작에서 공연까지」에 연재했던 원고들을 한데 묶은 내용인데 서울 문화 재단에서 500만원이란 지원을 받아 발간한 책이었다.
출판사‘지성의 샘’에서는 저자인 나에게 이른바 인세조로 책을 200부 보내 주었다. 그리하여 한동안 나는 골치 아픈 고민에 휩싸였다. 그 책을 집에 쌓아 두자니 짐스럽기만 하고 지인들에게 증정본으로 우송을 하려 해도 우송비가 만만찮아 기만 찰 노릇이었다.
생각다 못한 내가 지인들에게 책을 우송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메모 쪽지를 집어넣기로 했다.
이해를 바라면서
안녕하십니까? 이 책의 저자이며 현재 통권 26호까지 발행한 연극 전문계간지 <극작에서 공연까지>의 편집주간입니다.
종이책의 존재감이 희박한 시대를 맞은 탓에 구차하기 짝이 없는 쪽지 글까지 올리게 되었나 봅니다. 사적 노력으로서는 실로 힘겹게 집필 되었고, 어렵게 편집, 재작된 책이지만, 저에게 배달된 200권의 무게 아래서 다시 한동안의 고민을 하다못해 단안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의 연극사적 가치에 대해서는 저자 본인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문제일 테고, 출간과 동시에 재고로 묵힐 수만도 없는 입장이어서, 가까운 분들에게 증정하고자 결심을 했으나, 운반비, 봉투작업 및 우송료 등의 경비 또한 만만치 않아 부득이 온-라인 넘버를 명기하게 되었습니다. 두루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신한은행; 110- 001- 000000 김영무
어느 아침나절에 내가 이원승의 느닷없는 전화를 받게 되었는데, 그는 책을 잘 받았다는 축하와 아울러 1백만원을 송금했다는 사실을 일러 주었다. 나는 한동안 대꾸를 찾지 못해 침묵만 지켰다.
한참 만에 찾을 수 있었던 내 대답은 고작「고마워요」한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