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이 비탈에 서있네
한 기 홍
요즈음 국내외 정치, 경제와 사회 전반의 흐름이 거세다. 뉴스를 접하는 나 자신마저도 그야말로 격변하는 시대의 중심에 휘말리는 느낌이다. 세계적 뉴스의 중심에는 항상 미국이 있고 국내문제에는 좌우이념의 충돌이 있다. 최근 촬영한 사진들을 일별하다가, 작년 가을에 속초에서 넘어오다가 미시령 옛길 위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인공조림으로 사방(砂防) 부직포를 두른 비탈 위의 나무들이 미끌어질 듯이 서있다. 요즘의 뉴스로 접하는 걱정스러운 느낌들이 비탈에 선 나무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에 담겨 있었다.
문득 청년시절에 읽었던 황순원 작가의 소설 ‘나무들 비탈에 서다’가 희미한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소설의 스토리가 매우 강렬해서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몇 안 되는 작품이었다. 간략히 작품을 소개해 보면 이렇다.
황순원의 소설 ‘나무들 비탈에 서다’는 1960년 1월에서부터 7월까지 ≪사상계≫에 연재한 후, 그해 9월 출간한 소설로, 총 2부로 나눠져 있다. 제1부는 6ㆍ25 전쟁이 끝나갈 시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결벽적이고 내성적인 병사 동호가 술집 여자 옥주를 죽이고 자살하는 과정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제2부에서는 동호의 친구 현태가 중심인물인데, 전쟁 속에서 현태는 동호와 달리 강인해 보였지만 사실은 그 역시 섬세한 내면을 가졌기에 전쟁을 겪으면서 깊은 상처를 받았다. 전쟁 후에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며 방황하다 술집 여자 계향의 자살을 모른 척하고 구속된다. 한편 동호와 플라토닉한 연애 관계의 상대자이던 숙이가 현태의 아이를 갖게 되는데, 원하던 아이가 아니었음에도 그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고 결심하면서 마무리된다.
<인터넷 ‘네이버’ 검색 참고>
황순원의 집필 의도는 한국전쟁을 통하여 모두가 극심하게 겪었던 비인간성과 사라져버린 순수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며, 전후(戰後)에는 그 상실되었던 순수의 회복에 대한 기대로 이 작품을 썼다고 평가해 본다. 6.25전쟁 후 젊은이들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外傷))를 실감나게 파헤쳤다는 극찬과 함께 전쟁의 역사적, 민족적 의미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는 지적 또한 받고 있는 명작이다. 아울러 문단에서는 1950년대~196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전후 문학사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품 속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떠오른다.
주인공 동호와 일행이 절벽 길을 나아가는데, 모두들 겁이 잔뜩 나서 웅크리며 오금이 저리다던가, 눈앞이 아찔하다든가 하는 중에 동호 왈 “어! 추워”라고 하여 그 다음부터 동호의 별명을 시인이라고 불렀다.
오늘 지난 사진 한 장을 보면서 비탈에 선 나무들 중에 나도 서있는 느낌을 받는다. 가벼운 필력과 깊지 않은 내공으로 시인입네 자처하는 오늘의 자화상을 보며, 실소도 머금어 본다. 문득 창밖을 보니 비둘기 떼가 비상 중이다. 전선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새들과 같이 나도 비탈을 벗어나야지 뇌까리며 기지개를 켜본다